태교를 안 믿던 내가 태교를 믿게 된 이유

산부인과 의사의 태교에 대한 생각

by 오지의

산부인과 교과서를 펼쳐보자. 어디에도 '태교' 챕터가 없다. 태교에 분명한 과학적 실체는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산모들이 나에게 태교에 대해 묻는다면, 스트레스받지 말고 잘~ 지내라는 대답을 해준다. 임신 시기도 일상의 연장선에서 건강과 영양에 문제가 없도록 챙기고 안정적 상태를 유지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태아의 뇌 발달이나 정서 함양 같은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평소 안 하던 일까지 굳이 숙제처럼 할 필요는 없다. 모름지기 출산은 무탈하면 그걸로 최고다. 더 똑똑한 아기를 낳고, 더 훌륭한 산모가 되려고 애쓰는 태교에는 의미를 두지 않는다.


물론 나 자신이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첫 아이를 임신했지만, 자연스레 전통적인 태교에는 무심했다. 조선 왕실에는 임산부에게 온갖 금기로 가득 찬 시시콜콜한 태교 지침이 있다던데, 도시 생활인에게 그런 우아한 삶이 가당키나 하나. 분만 병원 근무는 바빴고, 출퇴근 길은 고되었다. 임신한 채로 애도 받고 배 가르는 수술을 했다. 내 취향도 한결같았다. 안 하던 뜨개질을 하거나 굳이 모차르트를 찾아 듣지 않았다. 밤에는 좀비 영화를 보고, 취미 삼아 코딩 공부를 했다. 한 마디로 살던 대로 살았다. 어쩌면 태교 문화가 예비 엄마들에게 은근히 강요하는 천편일률적인 이미지가 못마땅해서 나의 반골 기질을 드러낸 걸지도 모르겠다.


태교는 어쩐지 이런 분위기에서 해야 할 것만 같다..


하지만 둘째를 임신하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태아에게 철학책을 읽어주거나 영어 동요를 불러주는 열성 태교맘이 되었냐고? 아니다. 나는 여전히 그런 식의 태교를 하지는 않는다. 흥, 태교는 무슨. 애 등하원에 놀아주고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하루를 챙기다 보면 쑥대머리에 피로에 쩔은 아줌마만 남는다. 엄마 옆에서만 잠드는 첫째의 잠버릇에 밤새 시달리고, 동시에 뱃속 둘째 발차기가 더해지니 잠도 푹 자본 지 오래다. 사진 속 산모처럼 청초한 반묶음 머리를 하고 샤랄라 휴식을 취할 여유는 없다. 하지만 이번에는 좋은 태교로 각인된 특별한 순간이 있다. 나에게 있어, 태교의 재발견이다.




둘째를 임신했을 때부터 버거움이 많았다. 절박유산으로 여러 날 하혈하고, 입덧도 유난했다. 심지어 자궁경부무력증 때문에 입원해서 수술도 받았다. 노산에 고위험 임신인 데다가, 극심한 골반 통증 때문에 잘 걷지 못해 지팡이를 짚고 다닌다. 몸이 이 지경이지만 첫째를 챙기는 것도 엄마 몫이 없을 수는 없다. 이래저래 들들 볶이다가 밤이 되어야 겨우 한숨을 돌린다. 아마 많은 아이 엄마들이 공감할 텐데, 애가 잘 때만큼은 감수성이 다르다. 호오... 갑자기 애가 이뻐 보인다! 점점 튼실해지는 종아리를 주물러본다. 예전의 몰캉하기만 하던 신생아 살이 아니다. 하루 종일 뜀박질을 해대고 자전거를 타는 덕에, 근육의 단단함이 제법 느껴진다. 신생아 시절 꼭 쥐고만 있던 고사리손이 훌쩍 커져서, 이제는 젓가락질까지 능숙하게 해낸다. 고작 젖밖에 빨 줄 모르던 발간 입술로 꽤나 다양한 이야기를 하루 종일 종알댄다. 키도 제법 커져서, 침대에 같이 누워 있으면 1인분 공간을 당당히 점유한다. 직접 주무르고 킁킁 냄새를 맡지는 못해도, 뱃속의 둘째도 이렇게나 쑥쑥 자라고 있을 것이다.


단순히 애를 잘 키웠다는 뿌듯함 정도가 아니다. 이 느낌은 뭐랄까, 거대한 승리에 가깝다. 트로피도 관중도 쏟아지는 환호도 없는 늦은 밤, 소박한 잠자리에 불과하지만 분명한 승리의 현장이다. 사실 나의 승리는 아니다. 그렇다면 아기의 승리인가? 그것도 아니다. 정확히는 생명력의 승리다. 제2 열역학 법칙이 지배하는 무정한 우주에서 스스로 질서와 변화를 만들어내는 생명의 승리. 내가 비록 이 승리의 주역은 아닐지언정, 기쁨을 함께 누릴 자격은 충분하다. 잠든 아기를 가만히 내려다보면 마치 내가 오랜 세월 열성적으로 응원해 온 팀이 최정상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렸을 때처럼 만족과 희열을 느낀다. 아니지, 나는 단순한 팬 이상이다. 나야말로 이 영광의 둥지인걸. 깊은 고양감에 취해, 어쩐지 관절통과 속쓰림도 사르르 무뎌지는 것만 같다.


혼자 비밀스러운 만족을 누리고 있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첫째를 임신했을 때에는, 생명 자체에 대해 지금과 같은 경외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유난히 감정이 무딘 데다가 산부인과 의사인 나에게, 임신과 태아는 관리하고 처리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래서 탯줄로 묶여 있는 와중에도, 아이와 어떻게 연결될지 알지 못했다. 내가 어떤 기쁨을 누리게 될지, 얼마나 사랑하게 될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첫째와 쌓은 경험 덕분에 교감의 통로가 열렸다. 자연스레 둘째라는 새로운 가족과 맞이할 미래를 기대하는 마음을 지니게 된다. 오늘의 고충은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함께 새로운 승리를 맞이할 것이다. 잠든 아이 얼굴을 내려다보던 병들고 지친 쑥대머리 아줌마는, 비로소 깨닫는다. 지금의 감정이 태아에게 흘러들어 갈 것이라는 것을. 이 사랑에 아무런 실체가 없을 리가 없다는 것을.




여전히 태교가 임신에 필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개인적 경험만을 진정한 태교라고 주장할 생각도 없다. 우리가 지독한 경쟁 사회에서 살다 보니, 어느덧 태교마저 미리부터 자녀에게 탁월함을 심어주려는 작위적인 노력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때로는 극성스러운 조기 교육처럼 부담스럽기까지 하다. 다만, 태교의 본질은 산모와 태아 양쪽에 작용하는 긍정적인 심상이다. 진정한 태교란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대한 감정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 아닐까? 모차르트를 단순히 틀어주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함께 들으면서 교감하는 것, 책을 내용을 태아에게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다가올 미래에 대한 밝은 느낌을 전달하는 것이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임신 시기는 누구에게나 제법 고되다. 그 방법이 뜨개질이 되었건, 독서와 노래가 되었건, 산모가 희망을 품고 행복할 수만 있다면 고통과 스트레스도 줄어든다.


엄마와 태아는 생물학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따라서 정서와 호르몬이 연동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 매일 밤 승리의 순간마다, 희망과 사랑이 나에게서 그에게로 강처럼 흐를 것이다.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을 지언정, 그것이 내가 알게 된 태교의 진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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