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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브런치 글쓰기의 치명적 단점

조회수 2만 찍고 다음카카오 메인 걸린 글의 진실

by 오지의

저는 모성과 출산을 주제로 하는 글을 주로 쓰지만, 드물게 개인적인 신변잡기 글을 쓸 때도 있습니다. 그런 글 중 하나가 바로 '임신한 며느리...' 글인데요. 제 브런치 채널이 한산함에도 불구하고 이 글만큼은 조회수 2만 넘게 찍고, 브런치와 다음카카오 메인에도 한동안 걸려 있었습니다. 댓글과 좋아요 반응도 평소의 족히 몇 배는 되었지요. 한 마디로 제가 쓴 최고 흥행작 중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이 부끄러운 글임을 고백하려고 합니다.


https://brunch.co.kr/@follicle/127


가짜 에세이라는 뜻일까요? 인공지능이 썼다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원래는 비공개로 그날의 일기 삼아 적어둔 짧은 쪽글이었어요. 그런데 문득 이 소재가 브런치에서 먹히겠다는 판단을 한 거죠. 제가 아무리 정성 들여서 과학과 의학사, 산부인과를 둘러싼 진지한 현안을 다루는 내용을 써도 브런치라는 플랫폼은 도통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흥!) 하지만 어쩌다가 시댁, 비혼, 며느리 같은 키워드가 글에 들어가면 어김없이 메인에 걸어주더라고요. 이 경험이 몇 번 반복되다 보니 저도 알게 되었습니다. 플랫폼도 취향이 있구나.


'임신한 며느리는 시어머니 밥상이 싫다'는 여기에서 착안한 제목이고, 역시나 예상대로 다음카카오 메인, 브런치 메인에 떡하니 자리 잡았습니다. 노출은 당연히 엄청난 조회수로 이어졌고,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반응도 폭발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조금도 유쾌하지도, 자랑스럽지도 않습니다. 저는 경험을 순전히 브런치의 입맛대로 편집했습니다. 브런치가 저를 조종하지 않았더라면 굳이 공개하지도 않았을 내용을 일부러 더 자극적으로 만들어서 조회수를 끌어당겼습니다. 게다가... 서운한 일보다 감사한 일이 훨씬 많은 제 가족이 욕먹게 만든 것은 덤입니다.


브런치에 업로드되는 수많은 고부갈등 글들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글을 업로드한 저의 의도를 고려하면, 진정성이 부족한 글임은 확실합니다. 슬프게도 저 글만큼은, 제가 쓴 다른 어떤 글과도 확실히 다릅니다. 그래서 후회합니다. 읽고 열내주신 독자들에게는 미안하기도 하고요. 이런 해프닝은 근본적으로는 저의 어리석음과 욕심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런데 제 속이 좁아서 그런지... 저를 부추긴 브런치도 약간은 탓하고 싶습니다. 아니죠, 더 나아가서 플랫폼 경제의 한계를 짚어보고 싶습니다.


브런치뿐만 아니라, 기업이 만든 온갖 플랫폼의 공통된 딜레마입니다. 수많은 콘텐츠 중 어떤 콘텐츠가 '알고리즘 신'의 선택을 받을까요? 기본적인 완성도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일단 잘 팔릴 만해야 합니다. 사용자를 플랫폼에 최대한 오래 잡아둘 수 있어야 합니다. 제목/썸네일로 많은 클릭을 유도하고, 소비자가 나서서 반응할 만큼 극적인 내용이 먼저 주목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브런치는 주된 사용층의 연령대와 성별 때문인지, 진열대 가장 눈에 잘 뜨이는 곳에 걸어둘 상품 중 하나로 고부갈등을 선정했나 봅니다.


여러분이 플랫폼의 취향과 상관없이 뚝심 있게 자신만의 콘텐츠를 밀어붙일 수 있다면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브런치를 시작한 지 햇수로 어언 4년째. 제가 주로 다루는 과학, 교양 주제는 검토할 사항도 많고 자료 조사와 정리에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감사하게도 출간으로 이어지기는 했지만, 브런치 세계에서 반향은 미미해요. 제가 스스로 글의 질에 만족하거나, 특별히 중요하다고 생각한 주제 의식이 플랫폼 운영진의 간택을 받은 일은 없다시피 합니다. 창피하게도, 어느샌가 브런치의 눈치를 보게 되었습니다. 저도 글이 널리 읽히고, 독자의 반응이 뒤따르는 것이 좋으니까요. 만약 브런치의 장단에 맞춰주기만 한다면? 눈 딱 감고 흥행 키워드만 사냥한다면? 그렇다면 초심을 잃고 편리하게 조회수나 '벌어들일' 꿍꿍이를 품을 수도 있는 것이지요.


Your paragraph text.png 제 홈페이지에는 제가 직접 선정한 인기글(?)을 추렸습니다.


운 좋게 플랫폼의 취향과 콘텐츠 제작자의 취향이 맞아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강조하고 싶은 콘텐츠에 플랫폼의 은총이 닿기를 희망하는 것은 너무나도 희박한 확률입니다. 심지어 브런치는 인기글, 고정글을 지정할 수도 없습니다. (인스타그램, 유튜브와도 다른 점입니다.) 그럴 바에는, 글쓴이가 직접 나서는 것이 낫지요. 저는 홈페이지 메인 페이지에 제가 고른 글을 먼저 게시했습니다. 독자들이 이왕이면 이 글부터 봐주었으면 좋겠고, 그래야 저라는 작가가 어떤 부류의 글을 쓰는지 감을 잡는 데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서 고른 글입니다. 반면, 브런치에서의 노출은 에디터의 '픽'에 아주 크게 좌우됩니다. 제 홈페이지는 제 마음대로니, 제가 직접 '에디터 픽'을 고릅니다.


이상, 브런치 작가가 쓰는 브런치의 단점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아무래도 이 글이야말로 '브런치 픽'이 될 확률은 전혀 없겠군요. 씁쓸하네요. 그런데 어쩌지요. 이어지는 다음 글도 플랫폼의 단점에 대한 글입니다. 바로 콘텐츠의 영속성입니다. 브런치, 망하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습니까? 브런치가 없어지면, 작가의 자산과도 다름없는 콘텐츠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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