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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모님, 나랑 일 하나 하시죠

고위험 산모를 돌볼 이들은 어디에

by 오지의

자궁경부무력증으로 수술을 받은 후에도 직장 생활과 가벼운 운동을 하는 것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자궁 수축도 없었고, 경부길이도 더 짧아지지 않았다. 퇴원 후 외래 진료일, 담당 교수님은 내 경과가 양호하다는 설명과 함께 눈을 반짝였다.


"그거 마침 잘 되었어."

"저도 걱정했는데 정말 다행이에요. 감사해요."

"산모님이 산부인과 의사니까, 이제 우리 병원에서 일하면 어때요. 사정 알다시피, 일손이 영 부족해."


아 물론 이런 분위기는 아니었구요

... 예? 에구.. 그런 건... 그.. 저보다 훌륭하신 분들이 해야... 일단 저는 고위험 산모에, 곧 애도 낳아야 하고... 뭐랄까, 일단 지금 일하는 병원도 있구... (진지한 제안도 아닌데 이미 도망칠 궁리 중)


"어차피 앞으로 병원도 자주 와야 하는데 아예 산과에서 근무하면, 꾸준히 상태 지켜보기도 좋겠다. 어때요? 하하, 한 번 생각해 보셔요."

"아... ㅎ ㅎ..."




산과의 고질적 인력 부족


물론 농담이었지만, 백 퍼센트 농담만은 아니기도 했다. 안 그래도 항상 인력이 모자란 산부인과인데, 점점 더 정도가 심해지고 있었다. 당시 의정 갈등으로 전공의까지 현장에서 증발해 버리니 사람 가뭄에 교수진 속이 쩍쩍 갈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의대생일 때 이미 원로이던 교수님이 아직도 홀로 당직을 서고 있었다. 그 모습을 환자로 보게 되었을 때의 그 복잡한 마음이란. 물론 남은 사람들이 분발해서 병원의 핵심적인 기능은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최소한의 인력을 쥐어짜는 것으로는, 원활한 의사소통까지 보장할 수는 없었다.


의정 갈등 훨씬 이전부터 산부인과과는 가르칠 사람도 배울 사람도 부족했다. 2024년도 산부인과 전공의 선발도 정원의 2/3 정도밖에 채우지 못했다. 우리나라에 산과 교수가 올해 기준 125명(전임 교원) 뿐이다. 그마저도 고령화가 심각하다. 나 같은 40세 미만 전문의는 전체의 11.6%이다. 전국 의대에 젊은 조교수는 36명이다. 버스 한 대에 전부 태워도 자리가 남는다. 이 정도 인적 자원으로는 지역 거점마다 고위험 산모 집중치료실 같은 노동 집약적 시설을 운영하기 힘들다.


의사가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인력 부족은 고위험 저소득 구조를 가진 모든 진료과에서 족히 십 년 전부터 문제로 제기되던 부분이다. 그리고 이 담론의 상당 부분은 지방을 중심으로 부족한 인원을 보충해서 필수 의료가 '기능'하게끔 하자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마치 가로등이 없어서 어두운 동네에 가로등을 설치하자는 것처럼. 물론 그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내가 고위험 산모로 입원해 보니, 가로등이 있는 동네의 밤길도 그리 환하지 못하다. 내가 누워있던 8인 1실 고위험 산모 병동에서 8인 모두가 목 빠지게 하루 종일 교수님 한 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적절한 처치를 받고 있어도, 그것만으로는 마음을 다독이기에 충분하지 않다. 심지어 내가 약간이나마 흔들릴 지경이었다.


어쩜 좋아.
정말 나라도 여기 취직해서 일손을 보태야 하나?
저 산모들도 나랑 입장이 크게 다르지 않을 텐데.
궁금하고, 답답하고, 불안하겠지.
누구 하나 설명이라도 좀 해주면 좋겠다.


소통과 신뢰가 필요한 이유


고위험 산모 관리는 다양한 층위에서 산모-의료진 간의 협조와 소통, 지지적 신뢰 관계가 결정적이다. 임신부는 기본적으로 젊고 활동력이 있는 집단이다. 사회와 가정에서 기존의 역할이 있을 것이다. 고위험 임신은 통증이나 출혈처럼 증상이 명백한 경우도 있지만, 자궁경부무력증이나 임신성 당뇨처럼 별다른 신호가 없는 경우도 있다. 주관적 증상이 없어도 관리와 치료를 위해선 일상을 대폭 조정해야 한다. 충분한 설명만이 그런 수고로움을 정당화할 수 있다.


또한 산과적 의사결정의 특징이 있다. 최적의 분만 타이밍을 정하는 것은 고위험 임신에서 가장 중요한 결단이다. 때로는 만삭이 되기 전에 임신 유지와 분만 간에 득실을 저울질해서 최적점을 추산해야 한다. 하지만 시각적 자료나 명확한 지표를 근거로 제시하기 힘들다. 그간의 추이와, 검사의 패턴과, 의사의 감 등등이 종합적으로 작용한다. 산모에게는 직관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이렇게 빨리 낳아도 아기가 괜찮을까? 만약 더 기다리면 어떤 위험이 있는 것일까? 의료진이 복잡한 상황을 말로 충분히 풀어내어 전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임신부는 심리적으로 특수한 상태에 놓여 있다. 고위험 임신으로 분류되는 것 자체가 산모 멘탈에 상당한 타격을 준다. 아기가 어딘가 안 좋다고 하는데 온전히 이해가 안 되면, 안 그래도 예민한 마음이 불안하기만 하다. 고위험 임신 치료는 장기전이다. 설명이 부족하다면 협조도 어렵다. 산모가 의료진을 믿고 힘을 내서 버티려면, 단순히 아기를 위하는 일이라는 단편적 선언만으로 밀어붙여선 안된다.


소통이 부족할 때 일어나는 일


검사와 치료 중 일부분은 개인의 요구에 맞추어 어느 정도 조정할 여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인력이 부족하다면 세심하게 편익까지 고려하기보다는, 일괄적 접근으로 무게추가 기울게 된다. 소통이 부족해서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불편을 감수하다 보니 산모는 불만이 쌓인다. 어느덧 의심이 피어나고, 환자-의사 사이에서 깊은 신뢰가 쌓이기 힘들다.


부정적인 환자 경험이 부정적인 치료 결과를 만나면 소송으로 이어진다. 파국이다. 수년간 수십억을 두고 커다란 갈등이 폭발하게 된다. 여기에선 더 큰 문제가 발생한다. 의료진은 혹시 모를 분쟁의 가능성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를 방어해야 한다. 더 촘촘한 검사와 더 선제적인 처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는 다시 의료진의 업무 부담을 가중시키고, 또 다른 산모와의 소통 시간을 앗아간다. 이렇게 악순환이 계속된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하여


모든 집중 치료는 극도로 노동 집약적이다. 그러니 고위험 산모뿐만 아니라 의료진도 잘 버텨내야 한다. 그래야 산모는 건강하게 새 생명을 만나고 일상을 회복하며, 의료진은 후배를 양성하고 미래를 닦는다. 고위험 산모의 수는 점점 많아지겠지만, 산과 의사 쪽은 이미 버티지 못하게 된 것 같다. 일부 지역에선 당장 고위험산모 진료 수행조차 원활히 이뤄지지 않는다. 솔직히 이 글을 통해 의료진의 이상적인 소통을 강조하는 것이 무색할 지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향성은 올바로 잡아야 한다. 신뢰와 관계를 축적하는 것은 사람만이 해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중요한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입원 기간 동안 후배 전공의를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내 또래의 전임의도 아무도 없었다. 막상 고위험 산모가 되어보니 동료들이 야속하지 않았냐고? 조금도 원망스럽지 않았다. 나 자신도 산과 진료 현장의 모순을 견디지 못하고 떠났다. 누군가 비난의 화살을 맞아야 한다면, 애초에 지속 불가능한 생태계를 만든 자들이다. 의료가 과거보다 퇴보해서야 되겠는가. 더 나은 시스템이 절실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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