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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구석 난포 Jun 21. 2022

최초의 개복수술, 난소종양에 칼을 대다.


“오늘도 하루종일 수술했어.. 으으 종아리가 터질  같아.”


 전공의 시절의 흔한 하루다. 산부인과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대학병원에서 주로  일이 수술이라는  들으면 의아해하곤 한다. 산부인과? 그러면  아기 받는 일을 하는 거잖아. 수술이라니  수술? , 제왕절개 수술을 했나 보구나.


물론 분만은 산부인과 트레이닝의 중요한 영역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의료구조상, 대형병원은 아무래도 암수술에 많이 집중을 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막상 산부인과 전공의가 3 의료기관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일은 부인암 수술이다. 보통 개복 수술이라면 외과의사만 떠올리지만, 산부인과도 못지 않게  말이 많은 이유이다.




복강 안에는 여러 개의 장기가 있고, 그러다 보니 생길  있는 병도, 수술의 종류도 많다.  다양한 개복수술 중에서도 난소암 수술은 제법 오래 걸리고, 범위가 크고, 까다로운 수술인 경우가 많다. 이는 난소암의 특징 때문이다. 난소 종양은 크기가 아주 커지기 전까지는 별다른 증상이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렇다 보니 악성 종양일지라도 뒤늦게 발견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복강은 공간이 넓기 때문에, 종양이 상당히 자라기 전까지는 눈치채기가 힘들다.


1809 켄터키에 살던 45세의 제인 크로포드도  난소종양 특유의 함정에 빠졌다. 그녀는 배가 불러오자 자신이 임신을 했다고 믿었다. 배가 평범 수준을 넘어서 커지자, 아마도 쌍둥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체불명의 ‘쌍둥이 아무리 기다려도 태어나지 않았고, 이상하게도 배는 점점  불러왔다. 크로포드는 종양이 10kg 육박해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가 되자 왕진을 받기로 했다. 영국 유학까지 다녀와서 당시 지역에서 명망 높던 의사, 에프라임 맥도웰이 그녀를 진찰하기 위해 방문했다.


제인 크로폴드를 진찰한 맥도웰은 난소 종양이라고 결론을(솔직히 나에겐  부분이 가장 놀랍다! 초음파도 씨티도 없던 시대에...) 내렸고,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19세기임을 고려하면, 사망선고나 다름 없었다. 현재는 당연히 수술로 치료가 가능하나, 당시엔 개복 수술이란건 시도조차   없었다. 복강, 흉강, 두개강과 같은   공간은 감염을 차단할  없던 시대에는 접근조차 금기시되었다. 오히려 조악한 수술로 헤집어놓으면  죽을 사람도 죽었다. 맥도웰의 스승도 난소 종양에 있어서 개복수술은 금지라고 가르쳤다. 환자들은 복강 안을  채운 종양을 품고 살며 온갖 증상에 시달리다 죽었고, 치료법은 뾰족하지 않았다.


누구도 이런 수술을 시도해본 적이 없어요. 만약 하더라도, 사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고쳐달라는 환자의 거듭된 부탁에 맥도웰은 어쩔  없이 “혹시 우리 집에서라면, 수술할  있을 지도 모르겠군요라는 말을 남기고 집으로 돌아갔다. 제인 크로포드는 어떻게 결정했을까? 포기하고 받아들일 것인가, 운에 맡긴 도박을  것인가.  말도 안되게 대범한 여자는 무려 100km 떨어진 맥도웰의 집까지 한겨울 강추위를 뚫고 3 내리 말을 달려 찾아갔다. 그것도 엄청나게 부푼 10kg짜리 종양을 뱃속에 품고.




마취법도 없고 정립된 수술법도 없던 시대에 개복 수술을 하게  맥도웰은 절박한 마음으로 의학자료를  잡듯이 뒤져봤지만 도움이  만한 것은 없었다. 개복수술의 선례가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조수로 있던 제자는 이런 모험적인 수술을 했다가는 추후 살인죄로 몰릴 것이니 집도를 하면 안된다고 매달렸다. 수술에 반대한 것은 제자 뿐만이 아니었다. 동네 사람들도 들고 일어났다.  마을의 목사가 주장한 맥도웰이 ‘ 사람을 째는 악마의 수술 하려 한다는 말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분위기가 갈수록 험악해지자 맥도웰은 마을 사람들이 모두 교회에 모여 있을 크리스마스 아침에, 몰래 수술을 하기로 정했다. 최초의 개복 수술은 이렇듯 위험 천만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맥도웰이 환자의 배를 열자 비대해진 종양에 밀린 내장이 쏟아져 나왔다. 10kg 점액성 종양을 떼어내는 작업은 30 정도 걸렸다. 물론 환자를 마취할 방법 따위는 없었다. 크로포드는 수술 내내 허밍을 하며 스스로를 다스렸다. 종양을 모두 잘라냈을  쯤에는 군중이 맥도웰의  앞에서 소동을 피우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의 배를 가르고 장기를 잘라내는 수술이 성공했다는 놀라운 말에 이들은 하나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역사상 최초의 개복 수술이  끝난 참이었다.


제인 크로포드는 살았을까? 그녀는 수술을 받고  한달  회복한 다음, 다시 말을 타고 100km 떨어진 집으로 돌아갔고 78세까지 살았다. 훗날 켄터키 주는  의학사에 남은  역사적인 수술을 기념하기 위해, 그녀가 왕복한 길을 제인 크로포드 트레일로 명명했다. 맥도웰은  수술의 성공 기점으로  개의 난소종양 개복수술을  시행하며 초기 개복 수술법을 발전시키는데 공헌했다.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맥도웰이 걸어야 했던, 미답지에 대한 감각에 오싹한 기분이 절로 든다. 배를  다음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모르는 상태로 집도해야 하는 수술은, 얼마나 고독할까. 1809년의 성탄절로부터 20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수술의사의 트레이닝은 대단히 고도화되어있다. 수술에 필요한 생리학과 해부학은 완전에 가깝게 정립되어있고, 시험을 반복하며 젊은 의사들의 지식을 벼린다. 수련의는 여러 교수님들의 수술을 참관하고, 보조하고, 그것도 모자라 훈련용 기구나 실험동물로 연습수술도 한다. 그래도 실제 수술 상황은 무한에 가까운 변수가 등장하니 지식과 직관을 총동원해서  순간 적절한 판단을 해야 한다.


오늘날 나를 비롯한 수술의가 짊어져야 하는 부담의 정도를 현대의학의 태동기 수술과 비교하는 것은 당연히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든 수술에는 어느 정도의 ‘미지 존재한다. 수술의는  희뿌연 안개를 한풀 한풀 걷어가며  없이 손을 놀리고 판단을 한다. 촘촘한 방정식을 순서대로 연산하는 것이 아니고, 징검다리를 건너듯이 때로는 과감히 뛰어야 되는 종류의 작업이다.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100km 여정을 떠난 크로포드와, 전인미답의 수술을 시도한 맥도웰에게는 비슷한 종류의 용기가 있었을 것이다. 직관에 기댄 도약으로 안개 속으로  발짝  걸어들어갈 무언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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