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지의 Jan 04. 2024

임신-출산-육아, 때로는 기안84처럼

재생산과 불안 덜기에 대하여

아기가 잠이 들면 우리 부부에겐 짧은 여가가 주어진다. 찰나의 순간이기 때문에 TV를 보고 싶다면 꼭 보고 싶은 프로그램 1개만 허락된다. 신중하게 골라서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 2편을 재미있게 보다가(이미 3편이 방영중이지만, 늘 그렇듯 유행을 따라잡기엔 애 보느라 시간이 없다) 중얼거렸다.

“애 낳고 키우는 것 말야. 기안84처럼 해보면 괜찮겠는데? “

옆에서 듣던 남편이 울상을 지었다.

“뭐라고? 저렇게 위생 관념도 부족하고, 준비성도 없는 사람을 두고… 우리 소중한 아기를 저렇게 허술하게 키우자는 거야?”

“아니아니, 그게 아니고… “

나는 손사레를 면서 뭔가 부연을 하려다가 괜한 입씨름을 하지 않고 TV를 마저 보기로 했다. 화면 속에서는 우리 부부 비슷한 나이의 기안84가 인도의 결혼식장에서 춤사위광란의 몸부림을 선보이고 있었다. 하긴, 우리를 포함한 시청자들 갖는 이미지는 그럴 것이다. 재미있지만 닮고 싶지는 않은 사람. TV로는 보고 싶지만 곁에 있으면 답답할 사람.


우리 아기는 두 살이 되어간다. 내가 느끼기에 임신-출산-육아는 여행과 비슷하다. 만약에 이 재생산 과정이 정말로 여행이라면, 아마 그것은 세련된 선진국으로 떠나는 문물 견학이 아니고, 해변가 리조트에 머무르는 한적한 휴식도 아닐 것이다. 상당히 난이도 있는 험준한 트래킹 코스이거나, 편의시설이 절대 부족한 곳으로 떠나는 장기 배낭 여행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니 <태계일주>에 등장하는 여행과 비슷하다. 나는 이 재생산 여정에도 '여행가'마다의 여행 스타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도를 여행하는 기안84는 상인이 바가지를 씌울까봐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는다. 물론 북적거리는 곳에서 대놓고 지폐다발을 세는 지나친 안전 불감증을 본받자는 것이 아니다. 인도 특유의 문화, (우리 눈에 보기엔) 비위생적 환경, 입맛에 안 맞는 음식, 낯선 사람들의 낯선 행태가 큰 스트레스일 수도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기안84는 별달리 불편해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갠지스 강물에서 수영을 하거나, 고지대에서 야영을 하는 것을 끔찍한 고생거리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의미 있는 도전으로 여긴다. 준비물은 더없이 간소하게 최소한만 챙긴다. 한없이 연착되는 기차가 언제 도착할지 전전긍긍하지 않는다. 최적의 이동 루트와 최고의 환전 가성비를 고민하지도 않는다. 중간에 상황이 좀 틀어져도, 어설픈 흥정이 실패해도 별 불만을 갖지 않는다. 기안84의 이런 허술함은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흥행 요소이다. 오죽하면 장도연이 천부적인 개그 재능이라며 탐낸다. 실제로 기안84는 연예대상을 수상하며 최고의 예능인임을 증명했고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다.


나는 코메디언이 아니고 애기 엄마라서 예능감 말고 다른 점이 부럽다. (적어도 화면으로 보여지는 모습에서) 그는 불안이 낮다. 이것은 많은 현대인들이 갖추지 못한 소양이다. 똑똑하고 계획, 준비, 셈을 잘하는 사람들에게 기안84의 좌충우돌 스타일은 폭소 때로는 경악을 유발한다. 하지만 불안이 적고 느긋하다는 것은 변수가 많고 고된 여정에서 엄청난 장점이 된다. 그는 인도 특유의 무질서와 불확실성을 아무렇지도 않게 견딘다. (나에겐 그 멘탈리티가 갠지스 강물을 버텨내는 그의 위장보다 더 경이롭게 느껴졌다.) 예측과 통제가 어려운 것은 임신-출산-육아로 이어지는 재생산 특유의 속성이기도 하다. 그것 뿐만이 아니다. 그는 가성비에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집착하지 않는다. 요즘 같은 저출산 시대에 사람을 태어나게 하는 일이야말로 숫자로 효율을 셈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여행지에서 만나는 이들을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한다. 아기를 키울 때 꼭 필요하지만, 실제로는 갖추기 매우 어려운 자질이다. 물론 아무리 요모조모 뜯어봐도 기안84는 애엄마가 아니지만, 그가 여정을 대하는 태도는 나에게 충분히 인상 깊은 것이었다.


불안과 긴장이 적당하다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계량된 기준에 맞춰야 한다는 강박이 만연한 우리 사회에선, 재생산에 대해서조차 불안과 통제욕구가 지나쳐 보인다. 경험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아기를 임신하고, 출산하고, 키우는 일은 어차피 썩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준비한다고 다 대비되지도 않고, 궁금하다고 다 알아낼 수도 없고, 제어한다고 다 이뤄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조금은 느긋하고, 약간은 내려놓는 것이 꽤나 도움이 된다.


나는 오늘도 아기 밥을 정량만큼 먹이려다가 실패했고, 애를 정해진 시간에 재우려고 애쓰다가 실패했다. (그래서 이 글이 이렇게 늦은 시간 업로드되게 되었다.) 하지만 기안84라면? 그 정도는 딱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것 같다. 초보 엄마답게 나도 온갖 지침을 쫓아가느라 이런 저런 스트레스가 많았는데, 지금은 아기의 성장과 발달에 문제가 되지 않는 정도의 ‘표준 벗어남’에 대해서는 그냥 그러려니 한다. 연예 대상을 탔음에도 기안84는 여전히 ‘별종’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높은 인기를 생각해보면, 기안다움이 사람들에게 조금씩 스며드는 것도 괜찮을 것만 같다. 특히 재생산에 관련해서라면, 우리의 기본 불안 수준이 낮다면 꽤나 유익하지 않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