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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의 Jan 29. 2024

환자 보다 애 보다

인간을 돌보는 일, 의사와 엄마 사이에서

대학 병원 레지던트로 근무할 때 나는 미혼이었고 출산 계획이 없었지만, 아기를 낳은 선배들의 생활에 호기심이 넘쳤다. 산아 제한이 절정이던 80년대에 태어난 나는 외동인 데다가, 친척 중에도 조카나 어린 막둥이가 없었다. 산부인과 전공의를 하면서 적어도 임신과 출산 단계까지는 간접 경험이 제법 쌓였지만 아기와 함께 살을 부대끼며 생활하는 것은 완전히 미지의 영역이었다. 아기를 품고, 낳고, 키우는 것이 대체 어떤 경험이길래 산모들은 그렇게 웃고 우는 걸까? 나는 항상 새로 태어나는 아기들이 귀여운데, 내 아기라면 더욱 예쁠까? 아기 돌보는건 얼마나 힘들까? 때마침 출산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선배 레지던트에게 물었다. 


“선생님, 애기 많이 컸어요? 몸은 좀 어떠세요? 아기 돌보기 힘들지 않으세요?” 

“하하, 아기 보는거, 힘드냐고?” 

“애기 둘인 펠로우(전임의) 선생님이 그랬는데, 환자 보는 것만큼 고생스럽댔어요. 선생님은요? 어휴, 저는 너무 힘들 것 같아요.” 


내가 아기를 낳은 선배들마다 찾아가서 육아에 대해 병원 일만큼 힘든지 물어본 이유는 단순하다. 내가 본격적으로 경험해 본 사회생활이 대학 병원 근무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대답은 다양했다. 환자 보는것 보다 애 보는 것이 수월하다는 선배도 있었고(아기는 한 두명이지만 환자는 수십 명이니 더 고생스럽다는 의견), 환자 보는 것보다 애 보는 것이 더 힘들다는 선배도(의사는 경력, 급여가 쌓이지만 육아는 가시적 보상이 없다는 의견)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내 철없는 물음에 선배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하나같이 환자 보는 일에 비유해서 육아를 설명해주었다는 것이다. 


“흠, 나도 아기 키워본 지 몇 달밖에 안 되었지만… 내 생각에 신생아 보는거 산부인과 당직이랑 똑같애. 우리는 병원에서 지내다가, 신호가 오면 잘 살펴보고, 사람들한테 필요한 걸 해주는 일이잖아. 근데 아기도 그래. 밤낮으로 잘 살펴보고, 잘 지낼 수 있게 해주고, 울면 해결해주고… “

사람을 돌보고 요청을 해결한다. 그런 일이라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요? 그러면 환자랑 비슷하네요?”

“그게, 아직은 너무 아기라서 딱히 고차원적인걸 해 줄 수 있는 시기는 아니거든. 하여간 육아나 당직이나 잠 못 자는 거도 똑같네. 어때 지금 하는 일이랑 비슷하지? 그러니까 너도 할 수 있어.” 


당연히 자녀와 환자는 다르고, 직업으로서 하는 의업과 부모 역할도 동일하지 않다. 그런데 아마도 나와 동료들에게 돌봄에 대한 공감대가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그런 비유를 했던 것 같다. 애 보는 것과 환자 보는 것이 근본이 같은 ‘돌보는’일이라는 생각이다.




의료는 본래 돌봄을 기초로 하되, 과학적 지식을 쌓아 만들어졌다. 주의를 기울여서 상황을 살피고, 필요에 적절히 반응하고 해결할 능력을 갖추며, 더 나아가서는 결과에 책임을 지는 행위를 현대적으로 고도화한 것이므로, 출발은 돌봄에 있다. 그러다 보니 의사들이 가장 많이 쓰는 말 중 하나가 ‘환자를 보다’이다. “그 환자 봤어?” “미안, 환자 보다가 늦었어.” "이 산모는 특별히 잘 봐야되겠어." 의료 현장에서 워낙 흔한 말인지라 국어 사전에는 ‘보다’의 뜻풀이 중 하나로 ‘의사가 환자를 진료하다’가 등장한다. '보다'의 용례 중 하나가 '진료(의료 행위)'라는 뜻풀이다. 하지만 내 의견에는 ‘환자 보다’를 뜻풀이할 때에는 ‘아이를 보다’처럼 ‘맡아서 보살피거나 지키다’로 넓게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양 쪽 모두 돌본다는 뜻이다.


내가 ‘환자 보기’가 좁은 의미의 진료보다는, 돌봄 업무 전반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렇다. 의사는 모든 의료 행위를 '환자 보기'로 표현하지 않는다. '진료'이되 '환자 (돌)보기'가 아닌 예외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인턴이 하는 업무가 그렇다. 면허가 발급된 의사는 일반의로 남을 수도 있지만, 대개 인턴-레지던트의 수련을 거쳐 전문의가 된다. 인턴은 대학 병원의 까마득한 계급의 사다리에서 신출내기로 취급된다. 사실 이 새내기 의사들은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하기에 대형 병원 진료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이다. 이 환자의 소독을 하고, 저 환자에게는 동의서 서류를 챙기고, 또 다른 환자의 무균 채혈을 한다. 수술 보조인력으로도 참여하고, 때로는 고급 술기까지 해낸다. 다만 수련의 시작 단계에 있기 때문에 환자 치료 방침에 대한 결정권은 없어서 상급 의사의 지시에 따른 작업에 종사한다. 그런데 이 많은 일을 해내는 인턴의 일은 의사들끼리 ‘환자 본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대신 인턴 잡(job)을 수행한다고 말한다. 소독도 설명도 채혈도 명백히 환자에게 행해지는 치료의 일부이고, 인턴도 엄연히 면허가 발급된 의사이다. 그런데 왜 ‘돌봄’이 아닐까?


반면 불과 한 해가 지나서 레지던트가 되고, 자신의 담당 환자가 생기면 그 때부터 의사는 자연스럽게 ‘환자 본다’고 말한다. 나도 산부인과라는 전공 분야를 정하고 1년차 전공의가 되자, 내가 맡은 입원 환자들이 생겼다. 인턴이건 1년차 전공의이건, 수련의 단계에서 모두 초보인 것은 마찬가지다. 상급자의 관리와 감독 없이 혼자서 치료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다만 이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는 환자들의 이야기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무슨 병 때문에 무슨 수술을 받으러 입원한 사람이고 지금 상태가 어떠하니 앞으로 뭘 해줘야 하겠네. 아기가 이런 상황이라 병원에 온 산모인데 경과가 이만저만해서 몇 주째 집에 못 가고 있더라. 나는 기본적인 맥락을 이해하며 환자를 진료할 수 있게 되었다. 경력이 쌓이고 전문의가 되자, 본격적인 상담과 결정을 할 수 있었다. 치료에 쓸 약을 결정하고 자녀 계획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의사는 연차가 쌓일 수록 더 장기적이고 깊은 맥락에서 환자와 관계를 쌓는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가 인턴일 때 일하는 방식은 대체로 이런 것이었다. 담당의가 아무개씨에게 이러저러한 치료, 처치, 검사를 하라고 하면 그 일을 수행했다. 그 행위가 어떤 상황에서 필요한 것이고, 어떻게 수행하는 것이고, 어떻게 해석하는 것인지는 잘 안다. (많은 오해와 달리 인턴은 구경꾼이나 떠돌이가 아니고 의사이다.) 그래도 아무개씨를 ‘내가 돌본다’고 말하는 건 아무래도 너무 어색하다. 나는 아무개씨의 이야기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제 병원에 왔고, 무슨 지병이 있고, 어떤 어려움을 겪었고, 요즘 경과가 어떻고, 앞으로 무슨 치료가 더 필요한지 파악하는 것은 인턴의 업무 범위 밖이다. 서사의 결핍이 차이를 만든다. 대상을 돌볼 때에는 맥락과 관계가 동반된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의사가 보다 상위 단계로 나아갈수록, 환자와 더 고차원적인 관계성을 획득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다. 혹은 선후 관계가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한 명의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일은, 현장에서 풍부한 경력을 쌓은 이후에만 허락된 특권과도 같은 것이다. 대상에 대해서 더 깊은 이야기를 파악하고 결정, 책임지는 것은 의사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능력이고, 환자 입장에서도 자신과 그런 특별한 관계를 쌓은 의료진에게 더 큰 존중과 신뢰를 보내기 마련이다. 그러니 기계적으로 진료에 참여하는 것을 넘어서, 진정한 의미의 환자 돌봄을 맡을 수 있게 된 것이야말로 내가 수 년간 공부하고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성취이다. 




아기를 돌보는 것은 가장 흔한 형태의 돌봄이다. 그런데 돌봄의 위계에 있어서 의료와 반대로 설정되어 있다. 의사는 경험이 일천하다면 핵심에 접근할 수 없다. (풋내기 의사가 자신을 치료해주길 원하는 환자는 없을 것이다.) 의사는 돌봄의 가장 바깥쪽부터 점차 안쪽으로 진입하는 식으로 키워진다. 학생 단계부터 살펴보자. 의대생은 실습 목적으로 병원에 있지만 참관만 할 뿐 아직 의료 행위는 할 수 없다. 의사 면허를 발급받은 인턴도 대학 병원에서라면 부분으로만 진료에 참여할 수 있다. 수련의는 비로소 환자를 돌보게 되었지만 중대한 결정을 내리고 책임을 지려면 아직은 경력이 더 필요하다. 전문의쯤 되어야 내가 이 환자의 이야기를 깊이 이해하고 방향을 잡는 동반자가 될 수 있게 된다. 의사는 성장할수록 동심원의 안쪽으로 진입하며 점점 더 핵심적인 '돌봄'을 수행한다. 그런데 아기 엄마는 첫 번째 출산과 동시에 이 동심원의 정가운데에 떨어진다. 아기의 안위와 성장에 관련된 모든 것이 엄마의 역할, 엄마의 책임이 된다. 


의사 사회에 동심원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업하고 교육할 인력이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수련의 시절 벼락같은 불호령을 수도 없이 맞았지만 그래도 상급 년차와 교수님들에게 물어보고 배운 것이 더 많다. 내가 잠을 잘 때 내 환자를 돌봐줄 동료가 있었고, 나도 내 동료를 대신해 환자를 돌봤다. 손발이 되어서 많은 일을 거들어준 인턴들이 있었고, 실습 의대생을 가르쳐야 할 의무도 있었다. 이 정도의 체계가 협업 없이는 환자를 돌보는 막중한 일을 해낼 수 없다는 분명한 공감대가 있다. 아기 엄마도 이 막중한 돌봄 업무를 두고 분업과 협력의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모든 엄마들이 그렇게 운이 좋을 수는 없다. 친정과 시댁이 경험과 조력을 줄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아기 아빠가 새벽부터 늦게까지 일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맞벌이 부부도 많은 것은 물론이다. 어린이집 입소를 위해 몇 년간 대기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베이비시터를 고용할 만큼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 무엇보다 아기 엄마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유가 필요하다. 의사가 훈련을 거쳐 오르는 돌봄 동심원은 금자탑으로 여겨지지만, 아무런 조력이나 사회적 관계망 없이 고립된 아기 엄마는 깊은 구덩이에 빠진 것과 다름없다. 


아무리 골똘히 생각해 보아도, 아기 돌봄은 환자 돌봄과 유사하다. 아기는 비정상이 아니지만, 취약성 면에서 환자만큼이나 섬세한 돌봄이 필요하다. 갓난아기를 하루 정도 방치한다면 치명적인데, 이 정도로 돌봄이 긴급한 인간은 병원에도 그리 많지 않다. 신생아는 매 시간마다 들여다봐야 하니 환자로 치자면 엄연히 중환자다. 의사는 전문직이고 애 보는거야 아무나 할 수 있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아기에게는 내가 하나뿐인 엄마인 것을 어쩌겠는가. 아무래도 아기를 가장 오래, 유심히 관찰한 내가 아기를 가장 잘 안다. 그러니 나의 대행자가 나를 완전히 대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아기 돌봄에도 어느 정도의 공공성이 있다. 다정한 어미쥐의 돌봄으로 탄탄한 애착을 쌓은 아기 쥐는, 훗날 성장해서 새끼를 낳게 되었을 때 양질의 돌봄을 제공한다는 후생유전학적 근거가 있다. [1] 어쩌면 내가 힘들어도 아기를 한 번 더 들여다볼 수 있는 에너지의 원천에는, 아기이던 나를 돌봐 준 양육자들의 노력이 새겨져 있다. 돌봄을 수행하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다음 세대까지 돌보고 있는 셈이다. 


물론 다른 점도 많다. 의사는 점차 진급하며 단계적으로 경력을 쌓는다는 선형적 세계관에서 키워진다. 하지만 아이를 키워내는 일에는 전진도 후퇴도 없다. 나는 가장 자질구레한 일도 챙겨야 하는 사람이고, 양육 방향의 결정적 조타를 쥔 사람이기도 하다. 내가 아기 돌봄의 가장 말단이자 최고 경영자이다. 그렇기에 더 올라갈 곳도 없고, 더 떨어질 곳도 없다. 의사로서 조금씩 성장하면서 돌봄의 핵심에 다가간다는 느낌을 누린 것과는 대조적이다. 내가 일종의 '재생산 수련'과 '육아 경력'을 쌓아서 '내 아기 전문가'가 되었지만, 그 누구도 졸업장이나 기념패를 안겨주지 않는다. 사회에서 딱히 값을 쳐주지도 않는다. 아기와 양육자 사이는 신뢰, 서사, 책임이 삼위일체를 이루는 고차원적인 관계인데도 아이 돌봄은 그저 ‘집에서 애나 보는 일’이 되어버리기 일쑤다. 


병원에서 '원장님' 소리를 들으며 일하다가 (사실은 원장이 아니고 봉직의지만...) 집으로 돌아와 아기 엄마로 변신하는 순간의 낙차는 그래서 뒷통수가 얼얼할 지경이다. 돌봄의 대상이 환자에서 아기로 바뀐 것 뿐이지, 여전히 열과 성을 다해 돌봄을 수행하고 있는 나에게는 어딘가 의아한 일이다. 메디컬 드라마가 양산되고, 의대 입시가 피터지게 치열하고, 인간의 고통을 덜고 생명을 구하는 직업을 선망하는 사회는 바로 그 돌봄의 가장 기본 단위인 모성을 가장 존중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고소득 전문직 타이틀만 탐내는 물질만능주의 사회라고 손가락질 받아도 할 말이 없지 않겠는가. 


<참고 문헌>

[1] Weaver, I., Cervoni, N., Champagne, F. et al. Epigenetic programming by maternal behavior. Nat Neurosci 7, 847–854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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