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글은 이 의문에 대한 성의 있는 답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적습니다.
사실 중요한 질문인데, 지금 의대 증원을 둘러싼 논의에서 빠져 있는 것 같네요.
유튜브 언더스탠딩:세상의 모든지식 <이대로 가면 병원 파산 속출할 겁니다> 진행자(이진우) : 필수의료 의사가 부족해서 다들 야근도 하고 그러시는데..
늘리면 최소한 지금보다 나빠질 건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그 분들도, 늘린다는 것에 대해서 화를 내시고 계세요?
소설 <해리 포터> 시리즈 초반에 등장하는 장면이다. 말하는 분류 모자가 마법 학교 신입생이 어느 기숙사에 들어갈 지 정해준다. 마법 학교 호그와트의 학생 기숙사는 각각 중시하는 특성이 있는데, 용기, 지혜, 성실, 야심 등이다. 마법 세계관 답게 이 쭈그렁탱이 모자에겐 착용자의 생각과 기질을 읽어내는 능력이 있다. 심지어 학생의 적성 뿐만 아니라 의지도 존중해준다. 마법 모자는 주인공 해리 포터에게 '슬리데린'의 자질이 있다고 말하지만, 해리 포터가 거부하자 '그리핀도르'로 배정해준다. 하긴, 다른 뭣보다도 용기가 충만해야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 격에 맞는 것이다. 그래서 바로 이 기숙사 배정 장면을 통해 해리 포터의 핵심적인 특성이 드러난다. 참 영리한 서사적 장치이다.
한 명의 의사가 자신의 과를 선택하는 과정도 유사성이 있다. 의대를 졸업하고 시험을 통과하면 의사가 된다. 일반의로 남을 수도 있지만, 보통 수련을 거쳐 전문의가 되기를 선택한다. 본격 전공에 돌입하기 전에 1년의 인턴 기간이 있다. 달마다 과를 바꾸어가며 업무를 맡는데,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각 과에서 실제로 하는 일, 분위기를 알 수 있다. 1년을 병원에서 살다시피 지내다 보면(물론 비인간적 강도의 노동이지만 그것과 번외로), 각 과의 일을 해내는 데에 필요한 적성과 능력이 무엇이며 내가 그 일에 적당한 사람일지 스스로의 성향과 그릇에 비추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의사들은 1등부터 100등까지 순서대로 소득 높은 과에 지원하지 않는다.
수능에는 이른바 '배치표'라는 것이 있어서 몇 점은 무슨 대학 무슨 과, 몇 점은 무슨 대학 무슨 과를 간다고들 한다. 현실에서도 (결코 바람직하지는 않겠으나) 수능 성적 최상위권이 우르르 의대로 쏠린다. 그 밖의 대부분의 수험생도 점수 맞춰서 과를 선택하곤 한다. (이 시점에서 많은 수험생들은 막상 자신이 진학한 대학에서 뭘 배울지도 잘 모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그렇게 의대에 진학하여 졸업을 하고 의사가 되면, 막상 전공 선택에는 '배치표'가 없다. 과마다 평균적 소득, 위험, 근로 형태와 같은 현실적인 조건이 차이는 있다. 그래도 수험생 때와 달리 나름대로 합리성이 존재하는 생태계를 이루는 것이다. 꼴찌가 최고 인기과에 갈 수는 없겠지만, 결국은 자신의 선호를 고려해서 자율적 선택을 한다. 누군가는 수술을 사랑하고, 누군가는 학문적 성취를 중시하고, 누군가는 바이탈 뽕(사람 살리는 자부심)에 도취되고, 누군가는 여유로운 워라밸을 선호한다. 그래서 의사의 전공(과)은 그의 정체성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해리 포터가 그리핀도르라는 것이 해리 포터를 설명하듯이.
과를 고르기만 했다고 끝이 아니다. 앞으로 3-4년동안 수련을 받는다. (세부적인 수련은 더 길어지는 경우도 아주 흔하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한 변수이기에,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 자질의 진정성이 검증된다.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1] 특히 필수과/기피과 수련을 마쳐 전문의 자격을 획득했다면, 헌신과 책임감이 상당 부분 증명되었다고 의사들은 생각한다. 그렇기에 의사 집단 내부에서도 존중을 보내는 것이 관례이다. "오, 새내기 인턴이 흉부외과 전공하겠다고? 배짱 좋은데." "신생아 세부전공한 소아과 교수님이시구나. 아주 귀한 일을 하고 계시네." 적어도 의사들끼리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내 나름의 가치판단과 나의 성향을 고려해서 산부인과라는 전공을 골랐고, 이 선택에 (남들 앞에서는 창피해서 절대 말하지 않지만...) 미묘한 자부심과 긍지를 느낀다.
물론 이것은 의사의 소득이 어느 정도 보장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 소리로 치부할 수도 있다. 혹은 전문직 특유의 기득권(?)으로 비춰질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자신의 기질과 적성을 고려하여 자율적으로 자신의 평생 일거리를 정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의사의 전공 선택은 의사 세계만의 독특한 점이다. 의사가 전공할 수 있는 과는 25개나 된다. 다른 전문직도 양성 과정에 이 정도의 '개별성'을 보장하지는 못 할 것이다. 보통의 사무직과 비교해보자. 회사원 중에서 자신이 일할 회사와 부서와 직무를 1) 충분한 견습+보조 시간을 들여서, 2) 실무진 곁에서 함께 생활하고 호흡하며, 3) 의지와 취향에 따라 자의로 선택하고, 4) 타의에 의해서 직역이 바뀌지 않으며, 5) 장기간 전문성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대체 몇 명이나 되겠는가? 그런데 의사는 실제로 이 과정을 거쳐 전공을 고르고 평생의 업으로 삼는다. 솔직히 인정하자면, 낭만적인 세계관이다. (일상 생활에서 비슷한 예시를 도저히 찾지 못해, 판타지 소설을 동원해야 할 만큼..) 이렇듯, 의사 양성 문화는 통상의 직업 세계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면, 오해의 출발점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의 대입 체제가, 우리 사회의 취직 경쟁이 개인의 개성과 의지를 딱히 존중하지 않는다. 회사 어느 부서에 인력이 부족하면, 그 곳에 직원을 충원한다. 어떤 역할이 필요하면, 다른 일을 하던 직원에게 그 일을 시키기도 한다. 피고용자는 불만이 있을지언정, 고용주가 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 이것이 일반적인 현실이다. 대중 입장에선 바이탈 의사들의 반발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XX부서에 사람이 모자라서 일이 힘들면, 그냥 그 부서에 사람을 더 뽑으면 되잖아? 왜 필수과 의사가 증원에 화를 내?" (필수의료의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의사 측 주장은 이 글에서 굳이 반복하지 않겠다.)
여기서 설명이 필요하다. 정부 측 결정은 아주 큰 비율의 증원을 말하고 있기에 기존의 의사 양성 문화가 작게는 왜곡되며, 크게는 파괴된다. 호그와트에서 마법 모자를 씌우는 것은 몇 분이면 충분하지만, 의사의 수련은 기간과 규모가 훨씬 크다. 직역의 월급이나 위상을 떠나서, 개인의 자율과 적성에 기반한 전공 선택 기조를 유지할 수 없는 규모의 변화이다. 실제로 그것이 공공연한 정책의 목표이기도 하다. 공급 폭탄을 던진 후에 도태된 의사들이 기피과에 지원하도록 유도하면, 기피과 의사가 얼마간 늘어나긴 할 것이다. '낙수과'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반면 의사는 자신의 전공이 곧 정체성이며, 어렵고 힘든 과일수록 결코 '아무나'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바이탈(필수의료)이란 것이 소신, 자율, 능력을 모두 갖춘 사람이 긴 시간동안 스스로를 벼리며 증명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생명이란 중차대한 임무를 완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핀도르에는 그리핀도르에 걸맞는 사람이 들어가야 한다. 어디가 붐비거나 모자란다고 소신, 자율, 능력과 무관하게 한 뭉텅이 떼어서 다른 곳에 넣는 것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얼핏 보면 필수과 의사야말로 정부 정책에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할 것 같지만, 현실은 그 반대다. 사명감으로 일하던 필수과 의사들이 이번 정부의 결정에 크게 낙담하고, 깊이 우울해한다. 심지어 부분적으로 정책에 찬성하거나, 일부분 증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의사들조차 그렇다. 2000명 증원 결정을 '우리(정부)가 밀어넣기만 한다면, 네가 하는 일은 마지못해 누군가는 떠맡겠지.'라는 선언이라고 생각한다. 평생 해병대 출신임을 긍지로 알고 살아온 노병이 어느 날 '해병대, 지원자 부족으로 전면 징집제로 전환' 같은 뉴스를 듣는다면 이런 심정일까. 의사에게는 특정 분야 종사자라는 정체성이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그것을 공권력이 강제하거나 공산품의 수요-공급 논리로 치환하는 것이 부당해 보인다. 아니, 불가능해 보인다.
의대 증원 논란으로 의료계가 대혼돈에 휩쌓인 가운데, 의료계를 둘러싼 온갖 논쟁이 불타오르고 있다. 나 같은 일개 나부랭이가 그 불판에 감히 말을 얹는 것은 감히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런데 의사 집단을 '돈에 미쳐서 미용이나 해대는 돌팔이' 또는 '환자 목숨 위해 밤낮으로 헌신하는 참의사' 이분법적 흑백 논리로 나누길 좋아하는 언론의 렌즈로만 세상을 바라보면, 왜 바이탈(필수과) 의사들마저 이번 결정에 등을 돌리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본 글은 다른 논점은 제외하고, 의사 집단 특유의 문화와 감수성을 전달하는 글로 생각해 주시길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