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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운 Jan 08. 2021

선(線)과 협(俠), 선(善)에 대하여


  2020년 SBS 연기대상의 주인공은 드라마 스토브리그에서 냉철한 백승수 단장을 연기했던 남궁민이었다. 스토브리그의 화제성이나 남궁민의 연기력을 감안할 때 받을만한 사람이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스토브리그가 2019년 12월 13일에 시작해 2020년 2월 14일에 종영된 것을 감안하면 의외라는 의견도 있었다.


   전년 말과 연초에 걸쳐 방영한 드라마는 아무래도 여름, 가을에 방영한 드라마들에 비해서 기억이 흐릿해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기억에 남기 쉬운 여름, 가을에 방영한 여타 드라마를 제치고 2020년의 첫 드라마였던 스토브리그의 백승수 단장이 연기 대상을 받았다는 의미는 그만큼 스토브리그의 임팩트가 강했다는 뜻일 것이다.


  스토브리그가 화제가 된 만큼 숱한 명장면과 명대사들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 유독 기억에 남는 대사는 서영주와의 연봉 협상 장면에서 이세영 팀장의 “선은 네가 넘었어!”였다. 삭감된 예산으로 선수들과 연봉 협상을 해야 하는 백승수 단장에게 서영주는 부상을 달고 살고 사는 자신의 희생을 5억 원이라는 무리한 요구를 제안하지만 백승수 단장이 수용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서영주는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백승수 단장의 무릎에 양주를 쏟아버리며 ‘이러면 무릎에 물찬 기분을 좀 아실까? 공감하면 새로운 계약서를 가져올까 싶어가지고.’라고 말한다. 이를 본 이세영이 ‘지랄하네’라며 술잔을 벽에 내던져 깨버리자 서영주는 ‘팀장 선 넘었어?’라고 화를 내고, 이세영은 ‘선은 네가 넘었어!’라고 맞받아친다.


  이세영 역을 맡은 박은빈의 열연과 더불어 이 장면이 꽤나 화제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선을 넘는 누군가로 인해서 피해를 봤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선 넘는 사람들에 대한 짜증과 분노에 공감했기 때문일까? 어느 순간부터 아기공룡 둘리를 패러디한 엉덩국 작가의 애기공룡 둘리 만화가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고길동 집에 얹혀살던 둘리가 약속된 기간이 지나도 나가지 않는 것도 모자라 희동이 앞에서 대마초를 피우는 모습을 본 고길동은 참다 참다 못해 둘리를 향해 물을 끼얹는다. 물에 흠뻑 젖은 둘리는 ‘선 넘네?’라며 초능력으로 고길동을 괴롭히다가 마이콜의 도움으로 고길동이 둘리에게 복수한다는 스토리다. 


  애기공룡 둘리 시리즈는 2019년 8월에 처음 게재되었다가 2020년 8월 무렵부터 역주행하면서 ‘선 넘는 둘리’에 대한 숱한 패러디를 양산하고 있다. 스토브리그부터 애기공룡둘리까지 어떻게 보면 2020년은 선을 넘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화두가 되었던 셈이다.


  스토브리그야 워낙 이슈가 되었던 드라마니까 그렇다고 치더라도 애기공룡 둘리 같은 만화가 지속적으로 패러디 되는 것은 그만큼 ‘선을 넘는 것’에 대한 피해 경험이 있어 피해자인 고길동을 응원하게 되고, 고길동이 둘리에게 복수했을 때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선을 넘는다는 기준은 다르겠지만 보통 하나의 나라, 사회, 지역, 공동체 등에서 통용되는 일종의 도덕규범이자 법규를 어겼을 때 선을 넘었다고 말한다. 법규야 어기면 당연히 법적 처벌을 받아야 하지만 도덕규범의 경우 명문화된 것이 없고,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애매모호한 경우가 많다. 누군가가 선을 넘어 기분이 나쁘더라도 ‘원래 그래.’, ‘관습입니다.’와 같은 말 따위로 피해자가 예민한 것처럼 몰아가는 분위기가 만연한 이유다.


  누군가는 법으로 정해진 것이나 잘 지키면 되고 눈치껏 분위기에 맞추면 돼지라고 말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에서는 법조차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최소한으로 이것만은 지키자고 그어놓은 선인 법조차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 마당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기본적인 도덕규범, 예의가 지켜질 리가 없다. 더 큰 문제는 선을 넘는 사람들로 인한 피해는 대부분은 사회적 약자들이 받는다는 것이다.


  결제 대금의 지급을 차일피일 미룬다거나, 최저 시급만 맞춰주면 되지 야근 수당, 주휴 수당에는 무감각한 고용주로 인한 피해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2인 1조로 근무를 하고, 사전에 충분한 안전 교육을 시행해야 한다는 안전 수칙을 지키지 않아 구의역 스크린 도어, 제철소 공장 등에서 사람이 죽어 나갔다. 


  법이 아니라 일상에서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경우는 더욱 비일비재하다. 만나자마자 초면에 나이를 운운하며 하대를 한다거나 나이가 한참 어린 사람이 나이가 지긋한 하청업체 직원, 생산직 직원, 계악직 직원, 택배 기사, 버스 기사 등에 대한 멸시하는 태도와 말투를 보인다거나, 층간소음은 신경도 쓰지 않고 아이들이 뛰어놀게 내버려두는 부모 등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선을 넘는다. ‘임계장’, ‘맘충’, ‘노키즈존’, ‘갑질’, ‘꼰대’ 같은 표현들이 전부 선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등장했고 피해자들을 위한 '사이다'라는 말이 유행하게 되었다. 슬프게도 이 모든 것이 ‘세상이 원래 그래.’라는 한 마디로 용인되고 피해자는 ‘재수가 없는 일’ 정도로 넘어간다.


  개인적으로 ‘선’에 대해서 매우 예민한 편이다. 논리가 아니라 ‘어린놈이 뭘 알아.’라며 나이를 내세워 의견을 짓밟는 어른들, 학교까지 찾아와 따지는 드센 학부모에게는 찍소리도 못하면서 만만한 학생은 쥐 잡듯이 잡는 선생, 하급자라고 책임을 전가하는 상사들, 나의 실수에는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화를 내던 부모님이 본인들의 실수에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넘기는 모습... 학교에서 내가 배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모습들에 매번 분노했고, 매번 갈등을 빚어왔다.


  그 때마다 어른들은 ‘세상이 원래 부조리한 거야. 네가 뭘 할 수 있냐? 네가 바꿀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을 때 말해.’라고 말했지만 그 또한 이해할 수 없었다. 수천 권의 무협 소설을 보면서 선을 지켜야 한다고 믿게 되었고, 세상은 바꿀 수 있다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협 소설을 무공을 익힌 사람들의 판타지 같은 이야기이고 단순한 권선징악 혹은 일종의 영웅담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무협 소설은 ‘선(線)’에 대한 이야기이다.


  무협 소설의 두 축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무(武)와 협(俠)이다. 무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무공을 익힌 사람들, 혹은 무공 그 자체를 의미하고 협은 그들이 가진 신념 혹은 추구해야 할 궁극의 가치를 의미한다. 무협 소설 등장인물들의 별호에 ‘~협’이라는 말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유다. 무협 소설에서 말하는 협은 ‘선을 지키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 성공을 위해 혹은 내 잘못을 숨기기 위해, 단순한 재미를 위해 억울한 사람들을 모함한다거나 죽음으로 내몰지 말고, 거짓으로 남을 속이지 말고, 약자라고 무시하지 말자는 것이다.


  많은 무협소설들은 선을 넘는 가해자로 인해 부모를 잃고, 친구를 잃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재산을 잃고, 명예를 잃고, 자유를 잃은 주인공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주인공이 고난을 겪는 이유는 다양하다. 누군가의 재미를 위해, 주인공의 아내가, 딸이 너무 아름다워서, 잘 나가는 주인공이 부러워서, 보물을 독차지하기 위해, 혹은 소위 말하는 ‘대의(大義)’를 위해 주인공은 억울하게 고통 받는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대부분의 경우 주인공이 겪는 고통은 무림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던 일종의 관습이라는 이유로 묵살된다는 점이다. 소림사, 무당파와 같은 명문대파나 남궁 세가 같은 유명 가문의 사람들은 배경을 믿고 제멋대로 행동했고, 절대고수의 경지에 오른 이들은 그야말로 신 취급을 받으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이라는 미명 아래 힘없는 일반인들은 그들의 폭력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물론 제멋대로 행동하는 이들에게는 ‘~협’이라는 별호가 붙지 않고, 그들은 언제나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된다.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 무협 소설 속 주인공들을 동경했던 내가 그들처럼 선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당연한 결과였지만 단순히 무협 소설들을 많이 읽었기 때문에 ‘선’에 예민해진 것은 아니었다. 현실에서 비슷한 일을 너무 많이 겪었기 때문이다. 소림사, 무당파 같은 명문대파를 현대 사회의 재벌, 대기업이라고 말한다면 과한 비유일까? 스토브리그의 재송 그룹은 어떠한가? ‘회장님’은 손바닥 뒤집듯이 예산을 삭감했다가 늘렸다가하며 프런트를 압박하고, ‘회장님’의 권세를 등에 업은 아드님은 안하무인으로 행동한다. 리그 최고의 타자로 손꼽히는 임동규는 파벌 싸움을 일삼고 자신을 트레이드하려는 단장에게 타격 연습을 핑계로 협박한다. 시대와 장소, 사람만 바뀌었을 뿐 어디선가 많이 보던 장면들이었다.


  스토브리그 역시 드라마긴 하지만 너무나도 현실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것을 감안하면, 또 과거 논란이 되었던 ‘땅콩 회항’, ‘라면 상무’, ‘맷값 폭행’ 등의 이슈를 생각하면 소설과 현실이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협 소설과 현실이 다른 점이라면 현실에서는 소설 속 주인공이 얻는 기연 같은 것이 찾아오지 않아 억울함을 풀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무협 소설에 더 열광했는지도 모르겠다. 현실에서처럼 ‘세상이 원래 그런 거야.’라며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으니까.


  아직도 철이 덜 들었는지 소설 속 세상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건진 모르겠으나 ‘세상이 원래 그런 거야.’라는 말을 이해하기 힘들다. 그저 최소한의 선을 지키면서 살자는 말이, 선을 지켜달라는 말이 뭐 그리 잘못된 건지, 사회부적응자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역지사지 좀 하자는데, 입장 바꿔 내가 받고 싶지 않은 대우를 남에게도 하지 말자는데, 그게 그렇게 잘못된 일인지 잘 모르겠다.


  물론 당장 나 하나 떠들어댄다고 바뀌는 것은 없을 것이다. 나에겐 바꿀만한 힘이 없으니까. 내가 이것저것 요구해봐야 나에게 불이익이 돌아올 가능성이 높다. 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귀찮으니까. 


  바뀌지 않을 것도 알고, 불이익이 돌아올 것도 알고, 그걸 알면서도 떠들어야 하는 내 입도 참 피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떠들 것이다. 적어도 내 후배가, 내 동생이, 내 아이들만큼은 나와 똑같은 피해를 보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들에게 부끄러운 형이, 오빠가, 부모가 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선(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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