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기억들
볼링 동아리를 한 십 년 하다 보니 매년 적게는 10여 명, 많게는 50명 가까이 되는 신입생들을 만날 기회가 있다. 그들 중 80%가량은 볼링을 거의 쳐본 적이 없다 보니 안 좋은 습관들을 제법 많이 갖고 있다.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습관은 맥없이 툭~ 놔버리는 스윙으로 공에 제대로 힘이 실리지 않아서 핀에 도착하기도 전에 거터(레인 양 옆의 도랑)에 빠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주로 여자 신입생들에게 찾아볼 수 있다.
그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습관은 과도하게 힘이 들어간 스윙이다. 보통 핀을 ‘세게’ 맞춰야 많이 넘어질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팔과 어깨에 강하게 힘을 주는 것이다. 이 경우는 볼링을 몇 번 쳐본 사람들이나, 힘이 좋은 남자 신입생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힘이 너무 없으면 핀에 도달하기도 전에 거터로 빠져버리기 때문에 볼링공을 굴리는 데 있어서 어느 정도의 힘이 필요하다. 문제는 과유불급이라는 말처럼 힘이 많이 들어갈수록 어깨와 팔에 무리가 가서 많은 게임을 칠 수 없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스윙의 정확도도 매우 떨어진다.
높은 수준의 볼링 점수를 기록하기 위해서는 일정하게 스윙하는 것이 중요하다. 팔을 안쪽으로 ‘당기거나’ 팔이 바깥쪽으로 '벌어지는' 실수를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는 의미다. 쉽게 말하자면 뒤로 갔다가 앞으로 손이 나올 때 최대한 일자가 되어야 하고 하체는 흔들림 없이 피니시 자세를 유지해줘야 한다. 어깨에 힘이 많이 들어갈 경우 좌우로 흔들릴 수밖에 없고 하체가 흔들리면 당연히 일정한 스윙이 나올 수 없다.
신입생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면 힘을 빼고 어떻게 치냐고 되묻는 경우가 많다. 의외로 답은 간단하다. 볼링은 진자운동의 원리를 이용하는 운동이기 때문에 백스윙할 정도 힘만 있으면 자연스럽게 볼링공은 다시 앞으로 나오게 되어 있다.
실제로 볼링 선수들의 영상을 보면 피니시 자세에서 하체는 고정된 채 팔이 앞뒤로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다. 힘을 뺀 상태에서 부드럽게 스윙을 하면 진자 운동처럼 자연스럽게 앞뒤로 팔이 왔다 갔다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비단 볼링뿐이 아니다. 운동을 하다 보면 종목을 불문하고 ‘힘 빼’란 말을 가장 많이 듣는다. 야구의 경우 과하게 힘이 들어가면 투수는 공을 원하는 곳에 넣지 못하고, 타자는 원하는 타이밍에 공을 치질 못한다. 권투의 경우 동작이 커져서 상대에게 빈틈을 내주게 되는 반면, 정작 힘은 원하는 만큼 실리지 않는다. 너무 힘이 모자라서도 안 되겠지만 욕심에 과한 힘을 쓸 필요는 없는 것이다.
물론 10년째 볼링을 치고 있고, 웨이트 트레이닝과 MMA를 꾸준히 하면서 매번 노력하지만 순간순간 나도 모르게 필요 이상의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낀다. 머리로는 알아도 몸으로 체화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말하기와 글쓰기는 어떨까? 직접적으로 물리적인 힘이 들어가지는 않지만 아마 머릿속으로 더 많은 생각을 하는 경우가 과하게 힘을 쓰는 경우일 것이다. 이를테면, 취업을 위한 면접장에서 “나를 꼭 뽑아주세요”라고 어필하는 상황이라든가 소개팅할 때 마음에 드는 상대방에게 “나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매력을 보여주고 싶은 상황 말이다.
우습게도,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더 많은 고민을 했음에도 좋은 결과를 보여주는 경우는 많지 않다. 오히려 경직되고, 불안해하고,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더 많다. 준비한 대로 완벽하게 해야겠다는 강박관념 때문인지, 어떻게는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과하게 힘이 들어간 면접이나 발표에서는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심지어 침구들 사이에서 웃고 떠도는 농담도 실패했다.
안타깝게도 작정하고 준비한 ‘재미있는 이야기’는 늘 실패했던 반면 즉석에서 떠오른 대로 던지는 ‘아무 말 드립’이 더 재미있는 경우가 많았고, 고민 상담하는 친구에게 별생각 없이 즉석에서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말해주는 이야기들이 더 임팩트가 있었던 경우가 더 많았다.
나름 노력한다고 했음에도 1년 넘게 완소스피치에서 매달 발표를 했어도 우수 영상 한 편 남기지 못했던 이유일 것이다. 이제와 고백건대, 완소스피치 수업을 들으면서 한 번쯤은 우수 영상을 남겨보고 싶었다. 그 욕심을 한 번도 말하지 못했던 이유는 내 스스로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의 발표가 나보다 훌륭했기 때문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말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모든 것이 과한 힘이었다. 소위 ‘있어 빌러티’하게 말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자만심이라는 양념을 버무린, 자극적이기만 한 마라탕을 만들었다. 진지한 이야기만 한다고 사람들이 재미없다고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언젠가 스피치 특강에서 민호쌤은 그 어떤 기교보다도 좋은 소통방법은 진솔함이라는 말로 마무리하며 노부부의 이야기를 소개해주셨다. 투박하기 짝이 없는 어느 노부부의 대화는 스피치의 기법적인 측면에서 볼 때 고쳐야 할 것이 너무 많은 스피치다. 그렇지만 서로를 사랑하는 진솔함이 깊게 배어 있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줄 수 있었다. 마치, 자극적이진 않지만 충분히 음미할 수 있는 설렁탕과 같은 느낌이랄까.
이제는 힘을 좀 빼고 편하게 글을 써볼까 다짐했었다. 말을 할 때도 마찬가지고. 적어도 내 스스로 부담감 때문에 쓰다 덮도, 쓰다 덮는 일은 없도록. 슬프게도, 그 다짐을 하는 이 글조차 아직 힘이 많이 들어가 있는 것 같다.
여기까지가 3년 전, 제이라이프스쿨에서 스피치 수업을 한창 듣고, 글쓰기 스터디를 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때의 결심 덕분인지 마음을 비우고 몇 차례 외부 무대에서 스피치를 할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딱 거기까지였다. 여전히 온몸에 잔뜩 들어간 힘은 빠지지 않았다. 운동할 때도 뻣뻣하게 굳은 몸은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고, 드라마 대본을 쓰려고 한글 파일을 열었다가도 몇 줄 쓰지 못하고 덮어야만 했다.
언제쯤 조급함을 버리고, 강박증을 버리고, 편안하게 쓸 수 있을까.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