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에서 생긴 일
백화점에서 한우를 팔던 어느 날이었다.
“고객님 한 분이 오셨는데 화가 많이 나셨어. 정(情) 세트 하나만 빨리 가져다줘.”
“재고를 확인해보니 없네요. 컴플레인 건도 따로 전달받은 게 없어서요. 일단 대리님께 여쭤보겠습니다.”
직원 A가 다급하게 선물세트를 가져오라고 요구해왔지만 재고가 없는 상태였다. A도 백화점 직원이긴 했지만 어쨌든 신선식품 정육 담당 대리님은 따로 있었고, 상품의 재고도, 전달받은 게 없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선(先)보고 후(後)조치였다. 때마침 다른 고객 D가 주문했던 ‘죽(竹) 세트’가 완성되었을 타이밍이 되어서 다른 알바생 B에게 대신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곤 사무실로 향했다.
“이게 그거야?”
직원 A가 물어보자 알바생 B는 얼떨결에 자기가 들고 있던 ‘죽 세트’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물건을 가져오라는 말만 들었을 뿐 누구에게 전달하면 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A는 의기양양하게 죽 세트를 들고 컴플레인을 걸면서 기다리고 있던 고객 C에게 전달했다. 문제는 C가 원래 구매한 ‘정 세트’는 13만 원짜리였고 대신 받아간 죽 세트는 30만 원짜리였으며 그 물건을 가져갈 D라는 고객이 따로 있었다는 것이다. 30만 원짜리 13만 원 받고 팔고, 새롭게 30만 원짜리를 하나 더 만들어야 하는 난감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단순 산술로 47만 원의 손해가 발생하는 순간이었다.
불행 중 다행히도 주차장으로 뛰어가 출발하려던 C를 붙잡고 죽 세트를 돌려받을 수 있었고 조금 시간이 지체되긴 했지만 죽 세트는 원래 주인인 D에게 전달될 수 있었다. D가 컴플레인을 걸려면 걸 수 있었음에도 걸지 않았던 것도 우리에겐 커다란 행운이었다.
이 상황에서 가장 큰 문제는 뭐였을까? 컴플레인을 계속 걸면서 직원을 닦달한 고객 C? 고객과 상품을 확인하지 않고 그냥 내준 알바생 B? 아니면 정확하게 누구에게 전달하라고 말하지 않았던 나?
나는 감히 단언하는데 직원 A의 “이게 그거야?”라는 한 마디라고 생각한다. 만일 A가 ‘정 세트야?’라고 물어봤다면 B는 당연히 ‘아니요. 죽 세트입니다.’라고 했을 거고, 그랬다면 A가 그 물건을 들고 C에게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게’, ‘그거’와 같은 지시대명사로 뭉뚱그리니 B가 헷갈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아는 것을 상대방도 당연히 알 거라고 이거, 그거, 저거, 요거 같은 말을 남발하는데 한 번에 알아듣는 경우는 정말 드물다. 특히 집에서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어머니(혹은 아버지)가 심부름을 시킬 때 보면 ‘냉장고 열면 거기 있잖아.’, '부엌에 가봐봐'라는 식의 표현을 종종 쓰시는데 도대체 냉장고 어딘지, 부엌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냉장고 어디?’라고 되물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거기’다. 물론 어머니가 직접 찾으시면 0.1초 만에 찾아내니 내가 눈앞에 두고도 못 찾는 놈이 된다.
만일 회사에서 이런 표현을 쓰면 어떻게 될까? 손짓으로만 ‘이거를 2층에 그 사람한테 갖다 줘.’라든가 ‘이거 저쪽으로 옮겨줘.’ 같은 말을 들었다고 치자. ‘이거’는 도대체 서류인지, 도장인지, 비품인지, 차키인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그 사람도 마찬가지다. 김 대리인지, 이 과장인지, 박 팀장인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저쪽은 또 어딘가? 문 밖인지, 자기 책상 옆인지, 혹은 박 팀장 자리인지 어디란 말인가? 서류 자체가 다른 서류가 전달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야 할 수도 있다.
대부분의 회사에서는 ‘A 프로젝트 입찰 서류를 6층에 김 xx 대리한테 갖다 줘.’처럼 정확한 표현을 쓰는 이유다. 그래야만 절대로 실수하지 않고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길을 물어보거나 안내할 때를 생각해보자. ‘이쪽으로 가서 저쪽 골목으로 좌회전했다가 그쪽에서 우회전하시면 됩니다.’ 같은 말로 길을 안내한다면 아무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신촌역 2번 출구로 나와서 연세대학교 방향으로 직진하다가 오거리에서 신촌 기차역 방향으로 우회전하시면 됩니다.’ 정도는 되어야 길을 찾아갈 수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상대방도 알고 있다고 착각을 한다. 스탠포드 경영대학원의 교수이자 스위치, 순간의 힘 등의 책을 쓴 칩 히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식의 저주'다. 당연한 얘기지만 내가 독심술사가 아니듯이, 상대방도 독심술사가 아니다. 내가 알고 있다고 해서 상대방이 당연히 알 리가 없다. 지시대명사를 섞어 쓴다는 것은 소통을 하는 것이 아니고 퀴즈 맞추기를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상대방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어.’라고 말하는 이유다. 말을 할 때, 글을 쓸 때 지시대명사 대신 고유명사, 일반 명사를 활용한다면 한결 내 의견이 잘 전달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