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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좋은데, 너무 자주 들어서 그런지 사례가 뻔한 느낌이에요. 아 이쯤에서 야구 얘기를 할 거 같은데 역시나 야구 얘기를 하셨더라고요. 다른 신선한 사례가 없을까요?”
얼마 전 책을 읽고 돌아가면서 챕터 별로 내용을 정리해 발표하는 스터디에서 받은 사례가 식상하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지금 당장 행동에 옮겨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면서 ‘투수가 안타 맞고, 홈런 맞는 것이 두려워서 공을 던지지 않으면 게임이 진행되지 않는다. 던지지 않고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던져야 한다.’는 야구 이야기에 대한 피드백이었다.
2년 가까이 스터디를 하면서 계속 발표하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디테일한 내용은 다르더라도 지난번에 본 것 느낌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매번 새로운 사례를 찾는 것이 쉬운 일도 아니고, 번거롭다 보니 아무래도 친숙한 사례, 잘 아는 분야의 이야기를 자주 하게 된다. 나 같은 경우는 기승전야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야구 이야기를 많이 하는, 골수 야빠였다.
처음 야구장을 갔던 것이 언제였는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98년 언저리였을 것이다. 두산 그룹에 다녔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나도 두산 베어스(그 당시는 OB베어스)를 응원했는데 98년 42개 홈런으로 한국프로야구 신기록을 세우며 홈런왕에 올랐던 타이론 우즈를 좋아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많은 경우 부모님을 따라서 자신이 응원하는 프로팀이 결정되긴 하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부모님의 영향이 아니었어도 두산 베어스를 응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곰처럼 생긴 나와 곰을 마스코트로 미는 두산 베어스는 생김새만큼이나 꽤나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2000년을 전후해서 두산 베어스는 우-동-수 트리오를 중심으로 타격 쪽은 괜찮지만, 투수 쪽은 영 힘을 못 쓰는 반쪽짜리 팀이었다. 좋게 말해 화끈하게 치고받으며, 10점 주면 11점을 내서 승리하는, 재미있는 경기를 하는 팀이었지만 투수력도 약하고, 이렇다 할 스타 플레이어도 없고, 그 흔한 FA 영입조차 없던, 많은 부분이 아쉬운 팀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라클 두산이라 불리는 특유의 화끈함과 끈끈함 때문에 두산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2000년 역대 최강의 왕조로 군림했던 현대를 상대로 한국시리즈에서 3연패 후 3연승까지 치고 올라가는 모습이나 이듬해 2001년 10승 투수 하나 없이 정규리그 3위로 시작해 한화, 현대를 연파 후 삼성을 상대로 51점을 내주고, 52점을 따내며 세 번째 우승컵을 들어 올린 모습은 다른 팀에서는 찾아보긴 힘든 모습이었다. 언더독을 사랑하고, 투박하기 그지없는 내 모습과도 무척 닮아있기도 했다.
2010년의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 역시 미라클 두산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경기였다. 준플레이오프에서 홈에서 2경기를 내줬지만, 세상에서 제일 큰 노래방이라고 불리는 롯데 자이언츠의 홈에서 2연승 후, 기세를 몰아 잠실에서 5차전까지 승리를 거두며 리버스 스윕을 기록했다.
두산은 리버스 스윕의 기세를 몰아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을 상대로 1승 1패를 주고받고 홈 잠실로 올라와 3차전을 준비했다. 2010년 플레이오프 3차전은 내가 친구 K와 W와 함께 야구를 보기 시작한 첫 경기이기도 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기 전까지 야구 인기가 그다지 높지 않았던 터라 주변에 야구팬인 친구가 거의 없었고, 주로 부모님과 야구장을 가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플레이오프 3차전도 치열했다. 선취점을 먼저 내줬으나 두산이 역전했다가, 8회에 삼성에게 동점을 허용해 끌려가던 중 연장까지 승부가 이어졌다. 11회 초 2점을 내주며 패배하나 싶었으나 11회 말 임재철의 2타점 적시타, 손시헌의 끝내기 안타 끝에 두산은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다. 비록 4차전과 5차전을 내리 내줬지만, 역전에 성공했다가 연장승부에서 역전을 허용하고, 다시 짜릿한 끝내기로 승리한 3차전의 기억은 너무도 생생했다.
야구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야구장을 처음 와본 K는 그 뒤로 열렬한 두산 베어스의 팬이 되었다. 잘 모르는 스포츠일수록 아무래도 점수가 많이 나야 재미있는 법인데, 무려 역전에 재역전, 재역전까지 거듭한 끝에 팀이 승리했으니 재미있을 수밖에 없었다. 생판 처음 보는 남들과 하이파이브도 하고, 어깨동무하고 목이 터져라 응원가를 따라부르고, 주차장까지 내려오며 ‘사자 잡고 인천 가자!’고 외치다보니 야구 직관의 매력에 흠뻑 빠진 것이다.
늦바람이 무섭다고 했던가. 나보다 훨씬 늦게 야구에 입문했지만, K는 골수 야구팬이 되어 있었다. K는 나도 생전 사본 적이 없는 선수들 유니폼도 사고, 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지방 원정 경기까지도 따라다녔고, 이제는 내게 먼저 야구장에 가자고 하거나, 야구장에 갔다온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그 날도 K와 함께 오랜만에 야구장을 찾았다. 보란 듯이 선수 유니폼을 입고 야구장에 나타난 K를 보면서 내가 정말 야구를 좋아하긴 하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창때야 8개 구단 라인업을 다 외울 만큼 야구 기사를 빼놓지 않고 보긴 했지만, K뿐만 아니라 저마다 좋아하는 선수의 유니폼을 입고 열성적으로 응원하는 관중들과 비교하면 평범한 사복에, 어쩌다가 한 번 야구장에 오는 나는 야구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년 가까이 야구장을 찾질 않았더니 어느 새 주전 라인업이 바뀐 것은 물론이고 응원가도 많이 바뀌어 있었다. K를 따라 어설프게 동작들을 따라 하다 보니 잊고 잇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야구장은 모든 것이 용서가 되는 공간이었다. 타고난 음치요 박치인 나는 음가무(音歌舞)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초등학생 때 사물놀이 실기 시험 볼 때는 나 때문에 다른 친구들이 박자를 놓친다는 이유로 최저 점수를 받은 채 교실 뒤편으로 물러나야 했고, 중학교 때는 노래를 못 부른다는 이유로 음악 시간마다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K를 비롯한 친구들과 노래방을 다니면서 노래를 듣기 시작했지만 어디서도 내 노래가 환영받지는 못했다.
야구장은 달랐다. 제아무리 음치고, 박치여도 상관없었다. 야구장은 그저 응원단장의 구령에 맞춰, 배경음악에 맞춰서 목이 터져라 따라 부르기만 하면 되는 공간이었다. 동작이 틀려도, 박자를 놓쳐도 상관없다. 사람들의 시선은 그라운드와 응원단상을 향해 있고, 이미 정확하게 응원가를 따라 부르는 이들에게 묻혀서 티도 나지 않는다.
심지어 점수라도 나고, 경기에서 이기기라도 했다 치면 생판 모르는 남이라도 얼싸안고 손뼉을 마주치며 환호하는 일은 다반사다. 내가 어떤 사람이건 상관없다. 그저 같은 공간에서 같은 팀의 승리를 함께 응원한다는 마음만이 중요할 뿐이다.
야구장에서만큼은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되고, 남보다 뛰어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특정 누구를 가장 좋아하지 않아도, 선수 유니폼을 입지 않고 있어도 괜찮기 때문이다. 그저 최선을 다해 응원에 참여하는 모습만으로도 인정해주고, 주변 사람들과 한 팀이라는 동질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노래 부르고 춤추는 것뿐만 아니라 이렇다 할 재능이 없는 나에게, 눈치는 없는 주제에 꼬치꼬치 따지고 드는 나에게, 조금만 건드리면 흥분해서 날뛰는 나에게,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도 괜찮다고 허락된 유일한 공간, 그래서 나는 야구장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