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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운 Sep 07. 2021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

양식에 비해 한식이 대중화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반찬의 가짓수가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생각해보면 동네 국밥집에서조차 김치는 깍두기와 배추김치 중에 선택하도록 하는 경우가 많고, 백반 집에서는 된장찌개 같은 국 이외에도 아예 반찬이 6,7가지가 넘는 경우도 쉽게 볼 수 있다. 조금 고급스러운 한정식집이라도 가려고 치면 10~20가지가 넘는 반찬들이 줄지어 나오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반면 양식집에서는 돈까스, 파스타, 스테이크, 생선구이 등 대부분 단품 메뉴 구성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유독 한식에서 반찬 구성을 다양하게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비빔밥을 보면 꽤나 역사가 오래된 식문화인 것 같다. 어느 식당을 가도 쉽게 볼 수 있는 비빔밥 메뉴와 추가로 주문할 수 있는 볶음밥은 해외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메뉴다.


비빔밥에는 새참 먹을 때 빨리 먹고 일해야 하니까 대충 있는 반찬을 버무려서 비벼먹던 습관에서 유래했다는 다소 슬픈 유래가 있다. 맛이나 실제 유래와는 별개로 일부 나이 드신 어르신 중에서는 거지들이 동냥해서 받은 음식을 비벼먹는 모습이 떠오른다고 비빔밥을 싫어하시는 분들도 계시다.


비빔밥이 다소 싼티 나는 느낌이라면 구절판은 어떨까? 구절판은 고급 한식 요리 중 하나로 무려 8개의 음식을 밀전병에 싸서 먹는 요리이다. 구절판이 궁중요리였다고 하는 사람도 있으나 사실이 확인된 것은 아니다. 다만 9가지의 음식을 준비해야 하는 만큼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었다는 점은 틀림이 없다. 손이 많이 가는 만큼 동네 어느 식당에서나 쉽게 맛볼 수 있는 비빔밥에 비하면 구절판의 경우 특별한 명절날이나 고급 한식당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특식으로 자리매김했다.

비빔밥과 구절판 모두 여러 가지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모티브는 같지만 한 쪽은 저렴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고, 한 쪽은 고급스러운 음식으로 자리매김했을까? 만들기 나름이지만 어쨌든 비빔밥도 밥을 안치는 것은 논외로 치더라도 최소한 4,5가지 이상의 반찬을 알맞은 크기로 썰고, 밥 위에 예쁘게 올려줘야 하며 고추장이든 참기름이든 적당한 소스도 준비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준비할 것이 적은 음식은 아니다.


비빔밥과 구절판의 가장 큰 차이는 두 음식을 담아내는 그릇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비빔밥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그릇에 계란, 콩나물, 다진 고기, 당근 등이 구분 없이 올라가 있다. 반면 구절판은 찬합을 9개의 구역으로 나눠 각각의 음식을 담아낸다.

비벼 먹나, 싸서 먹나 어차피 뱃속에 들어가면 똑같은 음식이 될 것인데 무슨 차이인가 싶지만 보는 사람의 눈은 다른 모양이다. 구절판이 훨씬 먹음직스러워 보이고 요리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비빔밥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캐릭터의 가난한 형편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쓰이지만 구절판은 교양있고, 부유한 가정 형편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쓰이는 등장하는 이유다.


비빔밥이나 구절판이나 결국 나물, 다진 고기 등 비슷비슷한 반찬을 탄수화물(밥 혹은 밀전병)과 함께 먹는 음식인 것은 매한가지다. 어떤 그릇에 담아 먹는지에 따라 그 맛과 분위기는 천차만별이다. 찬합을 9개 구역으로 나눠 보기 좋게 음식을 담아내는 것,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이 바로 디자인이고, 기획이 아닐까?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을 설득하는 메시지는 늘 똑같다. 성적 향상, 높은 금리, 안전 보장, 색다른 즐거움 등등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지만 본질은 한 가지다. ‘이걸 선택하면 넌 만족할거야.’


똑같이 상대방이 만족할만한 선택을 제안하는데 어떤 사람은 거절당하고 어떤 사람은 선택당하는 이유가 뭘까? 근본적으로 제안 받은 선택이 비합리적일수도 있겠지만 똑같은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결국 디자인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보기도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옛 말처럼 똑같은 말이라고 해도 훨씬 이해하기 쉽게, 깊이 있는 고민을 한 것처럼 표현하는 것이 바로 디자인이고, 기획이다. 색감이니 폰트니, 레이어니 하는 거창한 용어들은 둘째 문제다. 예를 들어서 A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A-1, A-2, A-3, A-4 ~ A-8이라고 하자. 비빔밥의 방식은 이 여덟 가지가 필요해! 라고 한 번에 던져주는 방식이라면 구절판은 A-1부터 A-8까지 왜 필요한지, 어느 순서로 중요한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는 방식인 셈이다. 당연히 후자의 방식이 훨씬 이해도 쉽고, 설득력 있게 들릴 수밖에 없다.


이왕이면 내 식당에 찾을 손님들에게 더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서로 기분 좋은 것처럼 한 접시에 쓸어 담아 내갈 것인가, 정성껏 9개의 공간을 채워나갈 것인가 고민해봐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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