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이후 뇌가 기억을 꺼내는 방식에 대하여
선생님, 기억이 툭 오더니 제 옆에서
며칠이고 가만히 앉아 있어요.
트라우마 치료를 받는 한 달 내내
심리 상담사 선생님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이었다.
정상적인 관계의 종료 후 거쳐가는
부정, 분노, 우울, 타협, 수용의 애도 단계에서
나는 좀 벗어나 있었다.
내가 몰랐던 기억들이 너무 많이
그리고 너무 갑자기 몰려왔기 때문이다.
당황스러웠다.
적어도 내가 예상했던 방식은 아니었다.
결심을 말하기도 전에 이미 끝난 관계였는데.
그래서 나는 이 시기가 어쩌면
가뿐한 정리의 시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뇌가 할 말이 많았나 보다.
사건처럼 저장되어 있던 장면들을 하나씩
내게 꺼내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때는 별일 아니라고 넘겼던 순간들,
도무지 설명할 수 없어서 그냥 지나쳤던 불편함들,
감정으로 인식조차 할 수 없었던 감각들까지도.
왜 이제 와서 이런 기억들이 쏟아지는 걸까.
단지 잊고 있었던 게 아니라
아예 '알지 못했던 것'들이었다는 사실이
더 낯설기만 했다.
트라우마 관계에서
뇌는 생존모드로 스위치를 전환한다.
위협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느끼는 것보다 버티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 시기의 뇌는 해석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그저 장면을 데이터 형태로 저장만 한다.
관계가 종료되고 위협이 사라졌다고 판단되는 순간
뇌는 그제야 미뤄뒀던 일을 시작한다.
저장해 두었던 기억을 다시 꺼내서
"이제는 제대로 봐도 된다"라고 말하듯 재생한다.
그래서 나는 이별 후에야
이 관계를 처음부터 다시 겪는 것처럼 느껴졌다.
불과 3개월 전이었다.
자다가 얼굴을 맞은 것조차 기억 못 하고 있었다니.
기억이 돌아온 건 고통이 늘어서가 아니었다.
안전해졌기 때문이다.
내 뇌는 이제야 과거를 처리할 여유를 얻었다.
끝난 뒤에야 기억이 몰려오는 것은
트라우마에 중독된 뇌가 안전하다 느낄 때의
아주 정상적인 회복 과정이다.
내가 약해졌다는 증거가 아니라
이제 더 이상 버티지 않아도 된다는 신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