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순간, 뇌는 나를 선택했다

결심이 아닌 지연된 종료

by 한단단

그날

나는 대단한 결심을 한 게 아니었다.

각오도, 준비된 선언도 없었다.


다만 더 이상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이별 통보 다음 날

짐을 가지러 온 그의 "다시 시작하자"는 말 앞에서

나는 울면서도 돌아서지 않았다.

감정은 동요했지만

내 몸은 이미 그 관계를 떠나 있었다.


정도 있었고 흔들림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 단계에 들어선 뇌는

더 이상 희망을 계산하지 않는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는지도 따지지 않는다.


오직 하나만 남는다.


여기에 남으면, 나는 나를 잃는다.



그래서 나의 선택은

용기도 아니고 결단도 아니었다.

이미 종료된 시스템을

공식적으로 닫는 절차에 가까웠다.


그날 이후

나는 알게 됐다.

떠남은 언제나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회복의 문제라는 것을.


그리고 뇌는

회복이 불가능한 관계를

끝내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관계를 끝낼 때

'결심'이라는 말을 쓴다.

오래 고민했고 충분히 생각했고

그래서 마침내 내린 결정이라고.


하지만 돌아보면

그건 결심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뇌가 이미 떠나기로 선택한 뒤

의식이 그 선택을 따라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문장도 만들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내 몸의 반응을 관찰하고 있었다.




뇌는 위험을 예측할 때
사건의 크기를 따지지 않는다.
대신 패턴의 반복 가능성을 예의주시한다.



그래서 위협이 자주 오지 않아도

갈등이 매번 폭발하지 않아도

뇌는 계산을 멈추지 않는다.


이 구조는 다시 나타날 수 있는가.

이 신호는 우연이가 아니면 반복 가능한가.


이 질문들에

"그렇다"는 데이터가 내 임계치까지 쌓이는 순간,

뇌는 관계를

'설명 대상'에서 '종료 대상'으로 옮겨 놓는다.


그날도 특별한 날은 아니었다.

김치찌개를 먹고 있는 나를 향해

그의 이해할 수 없는 공격이 꽂히는 순간

내 뇌는 처음으로

이 관계를 설명할 필요 없는 위험으로 분류했다.


뇌는 이미 알고 있었다.


결정을 내린 날보다
결정을 말한 날보다
뇌는 훨씬 이전에 움직이고 있었다.




관계를 끝내는 건 의지가 아니다.


위협과 애정의 반복 속에서

뇌가 비정상적인 애착 회로를 형성하고

관계는 중독 상태가 되어 버리는

트라우마 본딩이라면 더더욱.


신경계가 더 이상은

이 환경을 살아낼 수 없다고 판단하는 순간

사람은 떠난다.


그리고

그 판단은 언제나 의식보다 먼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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