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생존자는 위기를 돌파하는 법을 알고 있다

회복 회로 재배선의 기억

by 한단단
암 생존자는 위기를 돌파하는 법을 안다.



이 말은 용기나 의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몸이 한 번 지나온 길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이미 한 번 무너진 적이 있었다.

예고도 없이 삶이 끊기고,

당연하던 모든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되었던 시간.


그때 나는 버티는 사람이 되는 법이 아니라

다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법을 배웠다.


아침에 눈을 뜨는 일조차

작은 결심이 필요하던 날들이 있었다.

몸과 마음의 상태를 확인한 후,

두려움 속에서도 하루를 시작하고,

불확실성을 없애지 못한 채

앞으로 그저 나아가던 시간들이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은 선택이라기보다는

혹독한 훈련에 가까웠다.

그리고 나는 그 시간을 모두 통과했다.




암 투병 이후 내 삶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회로가 남았다.


위기 앞에서 멈추지 않는 회로.

두려움이 있어도 일상을 다시 세우는 회로.

무너짐과 회복이 동시에 가능한 것을 아는 회로.


이번 이별 앞에서 내가 달라진 이유도

강해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미 지나온 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길은 내 생명과 함께 걸었기에
잊을 수가 없었다.



사람은 무너질 수 있고

그럼에도 다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막막함 속에서도 삶은 이어진다는 것을.

회복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반복되는 아주 작은 행동들의 총합이라는 것을.


그래서 이번에는 헤매지 않았다.


완전히 바닥에 닿기 전에 움직였다.

무너지기 전에 다시 루틴을 만들었고

흩어지기 전에 나를 붙잡았다.

몸이 기억하는 방향으로 걸어갔을 뿐이다.


결심의 결과라기보다 기억의 결과였다.




나는 처음 바뀐 사람이 아니라

이미 한번 바뀐 사람이었다.


암 투병 이후 만들어진 회복 회로는

사라지지 않았다.

시간 속에 묻혀 있었을 뿐

다시 필요해진 순간 되살아났다.


그래서 나는 알았던 것 같다.



위기를 돌파하는 법은
새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나온 나를 다시 믿는 일이라는 것을.



내 몸은 그 길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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