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런이 가르쳐 준 것들
나도 이 바닥에서 한 30년 일해봐서 다 압니다.
이번 프로젝트
'가격은 싸게, 질은 좋게, 스케줄은 최대한 빠르게'!
무슨 말인지 알죠?
1. 새롭게 만난 클라이언트가 첫 회의시간에 요구사항을 말했다. 핵심은 "싸게, 좋게, 빨리" 해달라는 주문.
속사포처럼 말도 빨랐다. 클라이언트와 친분이 있는 회사대표는 "이거 무조건 잘해야 한다"며 사활을 걸라고 압박했다. 빌런과 빌런 친구가 등장한 셈이다. 하..
2. 주말에 운동화 끈을 질끈 묵고 달리기를 하러 나갔다. 평소 속도대로 쭉 달리고 있었는데, 한 여자가 나를 앞질러 달려갔다. 그런데 내 앞에서 뚝 멈춰서 걷기 시작하는 거였다.
'아 인터벌을 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빠르게 뛰다가 속도조절을 하며 천천히 뛰는 인터벌이겠지
3. 여전히 내 속도대로 달리며, 걷고 있는 여자를 피해 다시 달렸다. 그런데 다시 여자는 나를 앞질러 뛰어가다가 내 앞에서 멈추며 또 걸었다. 내 달리는 길을 막고 걷는 이 여자 뭐지? 나는 다시 앞지르고, 그 여자는 다시 나를 앞질러 뛰어와 내 앞에서 걸었다. 응?
4. 10번도 넘게 나를 앞질렀다가 걷고 또 앞질렀다가 걷기를 반복하는 여자. 처음엔 장난인가 생각했다. 이렇게 3미터씩 인터벌 하는 게 맞는 건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엔 그러려니 했지만 점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5 그렇게 앞지르고, 걷기를 반복하는 여자. 나는 여자를 피해 달리다가 자전거와 동선이 꼬였다. 끽! 자전거에 치일 뻔했다. 둘 다 멈칫한 상황.
6. 팟! 그 이후부터 달리는 속도를 올렸다. 힘껏 달렸다. 또 앞지르는지 한번 보자 싶은 마음, 속도를 늦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 뒤에서 쫓아오는가 싶더니 더 이상 앞지르지 않았다. 난 계속 계속 멈추지 않고 달렸다. 그 여자는 사라졌고.
7. 달리기를 마치고 기록을 봤다. 빨랐다. 악에 받쳐 나온 기록이란 걸 안다. 나는 더 빨리 달릴 줄 알게 되었다. 화나서 달렸지만, 기록 가능성도 발견했다. 그 여자가 아니었다면 할 수 있었을까?
빌런이 날 키우는구나
8, 회사를 다닐 때도 그랬다. 회사 빌런 1은 사사건건 내게 딴지를 걸던 사람이었다. 상사라는 이유로 빈정거리는 말, 까내리는 말, 날카로운 눈빛에 나는 책잡히지 않으려고 동동거렸다. 이기고 싶은 마음에 울면서도 끝까지 했다.
9. 회사 빌런 2는 지독하게도 말을 듣지 않는 후배였다. 회사에서 내놓는 공인 빌런이었다. 말투가 몹시 예의 없었다. 나는 그 후배와 일을 할 때 인간 본성에 대해 알기 위해 공부를 했다. 사람을 이해하려고 애쓰고, 협상의 기술법도 배웠다.
10 회사 빌런 3은 빌런 2보다도 더 강력했다. 자기 업무 영역을 지키기 위해 나를 일에서 배제시키려고 했다. 엄청나게 화도 많이 냈다. 분노조절장애를 스스로 인정하기도 했다. 모두가 함께 일하고 싶어 하지 않는 그 사람, 하지만 일을 해야 하는 나. 지옥과도 같은 시간들이었지만, 어떻게든 내 방식을 만들어 뭐라도 했다.
11. 빌런 1 2 3은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빌런은 피하는 게 상책, 빌런을 대체할 실력을 키우는 건 필수'라는 것을 알았다. 정답 아닌 해답을 찾아야 했다. 바로 나만의 해답.
12. 모처럼 빌런 4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다. 다음 주에 빌런 4를 만나 또 일을 할 테지. 달리기를 하면 힘들지만 결국 더 단단한 사람이 된다. 세상은 빌런 투성이지만, 달리기를 하며 당당해진 마음으로 빌런들을 대하기로 마음먹는다.
'싸게! 좋게! 빨리'를 외치던 사람.
막상 빌런을 만나면 당황하고 속상하다. 하지만 안다.
어쩌면 빌런은 나를 키울 기회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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