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여름
31도 여름날, 아파트 단지
봄*가을이 없어지고 있다
겨울인가 하면 여름이다
사계절은 옛말이다
라고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올해는 특히 봄이 길었고 여름이 더디 오고 있다는 생각이다.
반 팔 입어도 괜찮고 긴 팔 입어도 괜찮으면 아직 여름이 아닌 것이다.
에어컨을 틀지 않고 창문만 열어놔도 살만하면 아직 여름이 아닌 것이다.
잠 결에 얇은 이불이라도 덮어야겠다면 아직 여름이 아닌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올여름은 꽤나 늑장을 부리고 있지 않았나 싶다.
그러면서 한 켠으로는 '얼마나 더우려고 이리 사정을 봐주나' 싶은 불안감도 스멀스멀.
그리고 과연,
"안녕, 그래 나야. 잘 있었지?"
악당의 미소를 지어 보이듯 그렇게 오늘,
비로소 여름이 도래했다, 낮기온 31도.
외출 전 집안을 왔다 갔다 하는 것만으로도 살짝 열감이 올라오더니
벌써 나갔다 들어온 거 같은 기분으로 겨우 엘리베이터 앞에 서자 땀이 줄줄.
아이와 아파트 단지 구석구석 돌며 카페도 들르고 공원도 갈 참으로
대형식품마트 장바구니에 공이며 발목 줄넘기, 무전기 등등 바리바리 싸들고 나온 남편이
그늘 한 점 없는 땡볕 한가운데 서서는 RC카를 조종하기 시작한다.
'정말이야?'
한 마디 하고 싶었지만 단전에서 끓어오르는 환호성을 질러대는 아이를 보며 참아졌다.
포기하고 나도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반짝이는 아이의 순간을 카메라로 담는다.
햇살이 어찌나 강한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
눈이 부시다 못해 눈물이 날 것 같이 시큰거렸지만 꾹 참고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지듯 감으로 연신 사진을 찍었다.
"와.. 이거 맞아?"
에어컨 바람과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대한 일념으로 카페를 향해 걷는데
뒤따라오던 남편과 아이가 영 뒤쳐진다.
뭐 하나 봤더니 500원짜리 뽑기 기계 앞에 해를 등지고 쭈그리고 앉아있다.
아이는 빨리 동전을 기계에 넣고 돌리고 싶어 성화고,
남편은 아이의 지갑 닫아주랴 동전 넣어주랴
"기다려 기다려 제발 기다려"만 연신..
'그래요.. 저는 먼저 들어가 있을게요..'
속으로 얘기하고 카페 문을 열자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벌게진 두 볼에 착 붙는다.
곧이어 누가 봐도 엄마 닮았네 할 정도의 빨간 얼굴을 한 아들이
"엄마 이것 봐! 내가 이거 뽑았어!"
한눈에 봐도 조악한 뽑기 장난감을 자랑스럽게 내밀며 들어온다.
인중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장군의 수염처럼 맺혀있다.
우리 세 가족은 그렇게 잠시 시원한 카페에 앉아
순식간에 달아오른 머리를 식히며 커피와 수박주스를 나눠마셨다.
"이제 또 가볼까?"
남편의 들뜬 한 마디에 신이 난 아들은 스프링처럼 튀어나가 버리고
그런 아들의 뒤를 쫓느라 황급히 나간 남편을 가볍게 흘겨보며
빨대 껍질이며 휴지며 뒷정리를 하고 나도 다시 문을 나섰다.
공원으로 가려면 단지 내로 이어진 30여 개의 돌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수십 번을 오르락내리락해 본 길이지만
이 더위, 이 꿉꿉함 앞에 수십, 수백 번이 다 무슨 소용이야.
계단을 다 오르고 나니 이번엔 야트막한 언덕길,
을 다 올라가니 다시 공원까지 이어진 완만한 능선이 300미터 정도 기다리고 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아파트 단지는 다 좋은데 그늘이 참 없구나.. 새삼 깨달으며
회색보도블록 깔린 가운데 먹색보도블록으로 만들어놓은 라인 부분을 양 발로 점프! 하느라,
쪼그려 앉아 "여기 좀 봐! 개미가 가고 있어!" 소리치느라,
RC카를 내려놓고 조종하다가 엉뚱한 방향으로 보내버리곤 다시 주워오느라..
아직도 갈 길이 구만리장천인데 느긋한 아들아,
가자.. 가자아.. 가자! 소리치다 보니 어느덧 도착.
나는 이제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고
저 멀리 보이는 정자 만을 향해 걷는다.
마지막 깔딱고개스러운 코스까지 올라와
그늘권에 들어가 짐을 내려놓고 아이고 모르겠다 하고 앉으니
비로소 바람도 느껴지고 파란 하늘 하얀 구름도 보인다.
고 새 달강이던 얼음이 전부 녹아 더 이상 차갑지 않은 커피를 한 입 마시며
여즉 찍고 까부느라 저 밑에 올라오는 중인 김 씨 부자를 느긋하게 내려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