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마중

보석이 여기 있다.

by FONDOF

2025년 2월 여수, 오동도








KTX로도 가는 데만 두 시간 사십여분이 걸리는 먼 곳,

여수에 왔다.

대한민국 최남단에 도착하니

갑자기 계절이 바뀌어 봄이 되어있는 듯하다.

서울보다 묵직한 공기 속에서 희미하게

젖은 흙과 연둣잎이 담긴 봄냄새가 났다.

날은 폭하고 바람도 살랑하니 많이 걷기에 딱 좋은 날이다.


엊저녁 순천에서 이곳 여수로 넘어와

케이블 카를 타며 처음 본 여수밤바다의 오색 반짝임과

해변에 즐비한 포장마차들, 젊은이들로 가득한 불야성을 내려봤는데

아침이 되자 또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공영주차장에 차를 대고 오동도까지 걸어 들어가는 코스,

많은 관광객들로 북적였지만 그 복잡함이 싫지 않았다.


"엄마, 나 솜사탕 하나만 사주면 안 돼?"
"에이, 단 거 너무 많이 먹으면 배 아파."
"히잉"


솜사탕, 번데기, 어묵 꼬치와 붕어빵..

거리를 메우는 간식 냄새들이 바람을 타고 와

어린 마음은 들썩인다.


아이는 둑방길에 누군가 그려놓은 그림 위로

장난감 자동차를 굴리면서 삐뚤빼뚤하게 걷는다.


오동도의 동백나무들에 꽃이 피었을까.

도톰한 동백잎과 빨간 동백꽃을

직접 보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내 마음은 벌써 봄이다.


저 멀리 오동도는 눈에 담기는데

좀처럼 가까워지지는 않는다.

짧아진 그림자,

정오의 해는 정수리에서 제법 뜨겁게 내리쬐고

살짝 땀이 나는가 싶어 외투를 벗어 왼팔에 걸쳤다.

쭉 뻗은 둑방길을 20여분 걸었을까,

드디어 오동도에 들어선다.


걸음마 뗀 날부터 산으로 숲으로 들판으로 벌판으로 나다니며

쌓아온 내공이 빛을 발하는 순간,

"세상에 웬 애기가 이렇게 잘 걸어?"

오고 가는 관광객들의 감탄을 실컷 들으며

절벽 계단도 씩씩하게 오르던 태은이의 볼이

어느새 발그스름 해졌다.

누군가 바람을 불어넣은듯한 볼따구에

작은 땀방울이 또로록 흐른다.


"더워, 이거 벗을래."

아이는 겉옷을 아무렇게나 벗어 바닥에 떨궈버린다.

옷이 땅에 닿기 전에 남편은 얼른 끄트머리를 낚아채며

"아잇, 그렇게 아무렇게나 버리면 어떡해? 요놈아!"

장난스럽게 아이를 간질이는 시늉을 하며 뛰어간다.


꺄르륵 아이의 웃음소리가 날카롭게 허공을 가르고

찰나의 소동에 주변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보곤

너그럽게 웃어준다.


나는 남편과 아이의 뒤를 따르며 뒷모습을 열심히 찍고

또 10초간 전력질주하여 앞질러서 앞모습을 찍어주었다.


아이는 아빠의 손을 잡고 몸을 기울여 끌어당기더니

이내 힘이 든다며 목마를 태워달라고 두 팔을 쭉 뻗어보인다.

15kg 아이를 번쩍 안아 목 뒤로 척 앉혀주는 남편과

신이 나서 아빠의 목을 조르며 깔깔 웃는 아이,

하나로 합체된 부자가

반짝이는 바다를 옆에 끼고 들썩들썩 걸었다.




동백꽃으로 뒤덮인 동백나무,

동백나무로 뒤덮인 섬.

남해의 파랑을 등지고 흐드러진 진녹과 진홍이 아름다웠다.









오동도에서 나올 때는 버스를 타기로 했다.

줄이 제법 길었는데 수용인원이 꽤 많아서

오래 기다리지 않고 금방 탈 수 있었다.

우리는 맨 뒷자리에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앉았다.

무릎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마주 앉은 부부가

태은이를 보며 웃어주고 계셨다.


“아이고 눈 좀 봐라, 보석이 여기 있다.
이 눈 반짝반짝하는 거 봐, 보물이다 보물이야”


몇 살이냐 물으시던 어르신,

이제 네 살 됐어요,라고 답하자 장난스럽게

“나랑 동갑이네!”

하신다.

인생은 육십부터니까 이제 막 네 살 되셨단다.

이런 류의 친근함이 참 좋다.


“잘생겼다 아주! 장차 우리나라를 이끌어 갈 상이여!”

신통해죽겠다는 듯 싱글벙글 바라보시는 덕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자신은 세 살이라 소개하시던 어머님과 두 분이서 다정하게 붙어앉으셔서

짧은 시간 들려주신 덕담 덕분에 더욱 기분 좋게 기억될 순간.


“애들은 무조건 놀이야뎌!
이렇게 좋은 디로 여행다니구 뛰어놀고 그게 최고여!
이 얘네들 머리 속에, 가슴 속에 을마나 좋은 기억으로 남겄어!
그 경험으로 애들은 다 알아서 배우는 거지!
공부는 허지말어!
아주 그냥 영어고 지랄이고 허지말고 많이 놀러댕겨잉?!”


아 좋다.

좋은 분이시다.


태은이는 할아버지가 화를 내는 건지, 장난인 건지 파악하느라

두 눈이 휘둥그레 해졌지만

나는 일말의 불편함도 없이

저 눈빛 가득 담긴 장난기를

아이가 금세 알아차릴 거라 생각했다.


갑자기 옆에서

“할아버짓! 쫌! 고만해 쫌! 엄마들이 어련히 알아서 한다구!”

하며 장난 섞인 잔소리로 상황을 정리해 주신 어머님 덕분에

한 번 더 웃었다.


5분 여 달렸을까,

버스는 금세 주차장 앞에 도착했다.

안녕히 가세요, 꾸벅 인사를 드리는데

태은이에게 악수를 청하시던 어르신,

씨익 웃으시는 미소에 금니가 반짝 보여서 더욱 개구져보이셨다.

그리고 그런 남편의 팔짱을 꼭 끼고

고만 가자고, 고만 치대라며 재촉하시는 어머님.


잠깐이었지만 두 분의 유쾌한 정으로

우리의 오동도는 그렇게 갈무리되었다.










#사소의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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