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완판본 글꼴 개발 과정
창작을 위한 설계와 문화자료의 복원은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다양한 복원자료에서 디지털화를 위한 디자인 요소를 뽑아내고 구현하는 것은 새로운 개발과 다를 바가 없다. 선대에 만들어진 완판본을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완판체”글꼴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복원과 개발 두 가지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는 작업이었다. “완판체”는 <열여춘향수절가>와 기타 다양한 완판본의 글자들이 가진 아름다움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선대와 현대의 통합 창작물로 제작되었다.
목판의 제작자에 따라 필체와 형식이 달랐고, 같은 글자도 글자의 위치에 따라 다른 모양을 가지고 있기는 하였으나, 처음 완판본을 접했을 때, 낱자의 형태가 서로 다른 상황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받혀주는 조화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부조화를 있는 그대로 글꼴에 담을 수는 없으므로 처음 눈에 들어온 판본의 느낌 그대로를 글꼴에 실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목판본의 특징상 같은 글자라고 하더라도 사용된 글자의 위치와 작업자의 작업 정도에 따라 형태에 적지 않은 차이가 있어서, 하나하나의 글자 형태를 있는 그대로 살리는 것보다는 전체적인 조화가 이루어져야 했다.
위의 이미지처럼 작업자의 차이 또는 글자의 문장 위치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글자들이 존재하여 이들을 종합하여 통일성을 가진 디자인 요소를 뽑아내는 일이 주요한 작업 원칙의 하나였다.
두 번째로 완판본의 글꼴은 세로 쓰기를 기반으로 제작되었고, 글자 하나하나를 새기며 공간 배분을 하여 글자의 높이가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세로 쓰기 기반의 글꼴을 제작하게 될 경우, 가로 쓰기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모양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컴퓨터에 이 글꼴이 탑재되어 일반인이 사용하는 폰트로서 가치를 가지려면, 원형의 구현과 동시에 현대적 글꼴 디자인의 요소를 가미하여 제작하여야 했다. 사용되지 않고 복원의 의미만을 가지는 글꼴은 생명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이유로 전체 글꼴의 형태를 “가로 사용”기반의 글꼴로 만들었고, 그 굵기는 본문에 적용할 수 있는 굵기로 정하였다.
세 번째로 완판본이 최초로 새겨진 매체는 목판이었고, 목판 또는 종이에 찍혀 보존되었지만, 현대를 사는 우리는 이 글꼴을 컴퓨터용으로 만들어낸 것처럼, 시대의 흐름과 기술의 발전에 따라 끊임없이 발전하는 완판체의 기반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기획자, 제작자뿐 아니라 이를 사용하는 사용자들의 개선 의지가 담겨야 할 것이고 이를 받아들여 진화하는 “완판체”의 모습을 계속 만들어나갈 방법을 만들어 보고자 한다.
제작의 과정을 굳이 구분하자면
1. 집자 및 디지털화 작업
2. 자형의 수정 및 낱글자 제작
3. 완성형 한글 제작
4. 조화되는 영문, 특수기호 제작
5. 유니코드 한글 제작
6. (필요에 따라) 고어 제작
과 같이 5~6단계로 구분하여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1번 “집자 및 디지털화 작업”과 2번“자형의 수정 및 낱글자의 제작”이다. 단순히 기존 인쇄물을 있는 그대로 가져오려면 스캔과 외곽선 추출과 같은 자동화 과정으로 모든 공정이 끝날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완판본의 특징과 현대적 디자인의 조화를 이루어 나가야 하는 입장에서는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부분이 이 부분이 된다.
앞서서도 기술한 것처럼 글자의 조형이 하나의 글꼴로서 일관성을 가지기 위하여 목판으로 구성된 각 글자의 조형을 새롭게 정리하여야 했다.
초기에 그림과 같이 두 가지 시안을 놓고 많은 고민을 했다. <시안 1>이 완판본이 가지는 원안의 느낌을 가지고는 있으나 각진 획들에 대한 부정적 반응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부드러운 획의 느낌을 갖는 <시안 2>를 함께 구상해 보았다. 그러나 <시안 1>이 완판체의 목판 느낌을 잃지 않는 구성이라는 의견들이 많아 <시안 1>을 최종으로 선택하였다.
또한 작게 인쇄된 경우 잉크의 번짐으로 각진 부분이 무뎌져 원본과 같은 부드러움이 다시 살아나게 된다는 것도 결정의 이유가 되었다.
글자 획의 농담을 조절하는 것 역시 원본의 형태를 따르기 힘든 부분이었다. 완판본 원본을 보면 가로획이 세로획에 비하여 크게 가늘고 그 시작의 형태가 삐침을 형성하지 않은 상태로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그러한 형태로 제작할 경우 글꼴 전체가 힘을 가지지 못하고 작게 인쇄될 경우 가로 획 의상 당부분이 인쇄 중 상실되는 것과 같은 상황이 보여 전체적인 균형을 깰 수 있었다. 이 부분이 전체 자소 디자인 형태 중 원형을 그대로 살리지 못한 여러 요소 중에서도 특히 아쉬운 부분이다.
ㅅ,ㅈ,ㅊ,ㅎ,ㅟ 등의 자소에서 원본의 구성과 현대적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다. 특히 “ㅖ”와 함께 쓰이는 “ㅅ,ㅈ,ㅊ” 의 자소 구성과 “ㅝ,ㅟ” 의 형태가 문제였다. 원본에서 해당 자소의 형태와 비교해 보면 당시의 “ㅝ, ㅟ”와 함께 사용되는 받침은 현대의 디자인에 비하여 상당히 작게 구성되어 있고, 그 부분의 공간을 적절히 이용하여 “ㅝ, ㅟ, ㅅ” 등이 만들어졌지만 이를 현대적 느낌의 받침 형태로 만들어 가면서 상대적으로 “ㅝ,ㅟ”의크기가 작게 디자인되었다.
가로획과 세로획의 형태 차이도 약간의 차이를 두었다. 목각이 가지는 나무의 결 때문인지는 모르나 세로획이 힘 있게 직선에 가까운 형태를 가졌다면 가로획은 직선에 가까우면서도 섬세하게 곡선의 미를 가지는 경우가 있었다. 이를 반영하기 위하여 가로획의 경우 직선과 곡선이 적절하게 조화를 가지도록 미세한 곡선을 포함하여 제작하였다.
또한 그림과 같이 “함”의 “ㅎ”과 “회”의 “ㅎ”이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모두 “회”의 “ㅎ”형태로 통일하였다.
자소 디자인을 결정하고 난 이후 원형을 일부 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 그리고 언젠가 폰트로서의 완판체가 아닌 원형 구성으로서의 완판체를 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조금 덜 조화롭다 하여도 더 원형에 가까운 완판체를 만들어 보고 싶은 소망이다.
낱글자 제작이 완성된 이후 글꼴 전체를 완성해 가는 과정은 다른 글꼴 제작 작업과 다르지 않았다. 단, 우리 회사에서 기존에 사용하던 글꼴 조합 조합 테이블(CMAP)을 그대로 적용하려고 하니 “ㅕ,ㅖ”와 만나는 “ㅅ,ㅈ,ㅊ”의 모양이 문제였다. 이는 별도의 조합 테이블을 만들어 수정하였다.
완판본의 목판 글꼴 자체가 가지고 있는 조형의 우수성이 낱글자의 적절한 조합 만으로도 아름다운 글꼴의 모습을 보여주게 되어 각 글자의 무게 중심과 여백을 미세하게 조정하여 글꼴을 완성하였다.
이러한 디자인 과정을 거쳐 시험인쇄를 한 이후 각 글자의 위치와 중심을 재차 수정하는 작업을 거쳐 완판체가 완성되었다.
기존 KSC 5601 기반의 2,350자의 글자들은 완성형으로 제작되었고, 그 이외의 유니코드에 해당하는 글자들은 조합자를 제작하여 구현하였다.
사용되지 않는 글꼴은 제작의 의미도 없다.
원본의 정교한 디지털 복원이 이번 프로젝트의 과제는 아니었고, 원본과 형태를 달리할 수밖에 없는 아쉬움이 많지만, 과거 완판본을 제작하신 선조들이 자신의 작업을 대중들을 위한 문화정보의 전달이라고 하는 것에 비중을 두었다면, 글꼴이 가진 가장 큰 뜻은 정보전달의 아름다운 매개이므로 사용자가 누구나 편하게 사용하는, 애착 가는 글꼴을 제작하는 것이 필요했고, 그러한 글꼴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완판체”의 제작은 마쳤으나, 제작자의 한 사람으로서 가지는 “완판체”의 현재 의미는, 묻혀있던 글꼴이 간신이 숨을 쉬기 시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누구나 완판본의 글꼴에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고, 이러한 관심을 통해서 글꼴은 새로운 생명을 가지게 될 것이다. 다양한 서적, 영화, 디자인에 “완판체”가 이용되고, 필요에 따라 새로운 포맷을 가지게 될 것이며, 이를 통한 요구 사항이 생기게 되면 글꼴은 함께 진화하는 과정을 가지게 될 것이다. 또한 고정 폭으로 제작된 현재의 글꼴을 가변 폭으로 조정하고, 가로 글꼴로 제작된 글꼴을 세로용 중심 이동을 하는 등의 다양한 실험과 변형을 기획하고 있다.
선대에 한글을 목판에 새긴 글꼴 제작자와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는 현재의 우리가 함께 “완판체” 글꼴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무한한 기쁨을 느끼고 이러한 기회를 함께 한 것에 대해 감사한다. 더불어 우리의 소중한 문화 자산인 한글이 이 땅에 뿌리 박고 사는 우리와 함께 문화를 만들고 전달하는 커다란 힘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본 글은 2013년 완판본 마당체 개발 후 그 발표 당시의 내용을 설명한 글이다. 완판본 마당체는 2016년 고어를 추가하고, 3가지 굵기로 순체 / 각체 등으로 구분되어 발표되었고 그 이름도 "전주 완판본체"로 변경되어 전주시의 공식 글꼴로 채택되었다. 전주시의 공식 사이트에서 무료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