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에 몇 년을 끌어 오던 서예 글꼴의 폰트 만들기 작업이 엎어졌다.
정성을 다해 작가와 함께 고민하고, 컨설팅했었다.
작가분은 같은 글자를 수십 번 쓰고 고치기를 반복하시고, 직접 스캔 작업까지 도와주셨지만, 몇 년을 이야기하고 진행하던 작업이 엎어진 것이다.
한편으론 들어간 서로의 노력, 돈, 시간이 너무 아쉬웠지만, 작업의 포기를 결정하신 작가분의 의견을 존중해드렸다. 어떤 노력으로도 만들어진 글자가 작가분이 의도하신 붓 맛과 흐름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디지털화에서 오는 생략과 단순화에 대한 이해를 하셨지만 이해와 느낌은 다른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만들어진 글자에 대한 불만족이 아니라, 자신의 글자가 부끄러워진다고 하시니 말릴 방법이 없었다.
가끔 회사에 자기 손글씨나 붓글씨를 폰트로 만들고 싶다는 연락이 온다.
그저 그들이 알고 싶은 건 시간과 비용이다.
우리가 얼마라고 이야기를 하던 그들의 예산을 넘어선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그들이 흔히 하는 이야기는
"다른 데서는 보름이면 만들어 준다는데요?"
"백만 원이면 된다던데요~"
정상적으로 글꼴을 만드는 업체라면, 그 정도 시간과 비용이면 기획도 마무리되지 않는다.
있는 글자를 스캔하여 디지털화하는 것이 뭐 그리 어렵겠느냐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지만, 같은 글자도 여러 곳에 사용되고, 손으로 썼을 때 한껏 멋을 부려 고저장단의 흐름을 만들어서 썼던 글자들이 비슷한 높이의 비슷한 넓이의 글자들로 조합되는 순간 그들의 기대가 날아가 버릴 것을 나는 안다.
손글씨로
"다양한 글꼴을 가진 한글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를 흘려 쓴 후
"다양한"에서 써진 "다"와 "~습니다"에서 써진 "다"를 비교해 보라.
그 모양이 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고 각 글자의 넓이 역시 천차만별일 것이다.
이를 어떻게 절충할 것인지가 손글꼴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기념품처럼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용할 글자를 만들어야 하고, 만들어진 글자를 모아 하나의 꼴을 만드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폰트를 만들거나 소프트웨어 개발 사업을 하면서 오랜 시간 노력을 기울이고, 결과에 대한 확신이 있었던 프로젝트가 실패한 경험이 많이 있지만, 시간이 흘러 뒤돌아 보면 엎어진 일들은 다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고, 그런 이유를 극복하였기 때문에 그다음 프로젝트의 성공이 있었던 것 같다.
특히 글꼴을 디자인하여 하나의 폰트를 만드는 일은 오랜 기간 마라톤을 한다는 마음으로 시작해야 하는 일이다. 최소한 2,000 여자의 글자를 동일한 디자인 콘셉트로 만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마라토너도 뜻하지 않은 이유로 완주하지 못할 수 있다.
폰트 업계에서 제대로 일을 해보려고 하거나, 본인의 아름다운 손글씨를 직접 폰트로 만들고 싶은 분들은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만들기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