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준거 집단은 자신이 선택할 자유
어느 순간부터 삶이 너무 불행하다고 느꼈다. 그렇게 느끼는데는 나의 아버지의 존재가 큰 원인임을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알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아버지는 자식에게 자기자신의 인생을 선택할 선택권을 주고 거기에 대해서 책임감을 가르쳐 주는 어른이다. 그런데 우린 집은 아버지가 자식들의 문제 포함 모든 대소사를 자신이 마음대로 결정하고 책임은 우리에게 미루신다. 그게 너무 큰 부담이 되어 인생이 점점 망가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내가 아직 나잇값을 못하고 있어서 일방적으로 우리가 살기 힘든 것이 아빠만의 탓이라고 하지는 못한다. 내 탓도 있다. 어쨌든.
자식이기는 부모는 없다는 말이 있다.
근데 그와 반대인 가정도 있다. 우리 집이 그렇다.
우리 집은 아버지가 자식들을 이긴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톨스토이의 안네 카레리나의 맨 처음에 나오는 구절이다.
나는 이 구절을 우리 집에 대입해 보았다. 개인적인 해석이므로 사실은 다를 수 있다.
보통 자식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하는데 행복한 가정은 이 말이 잘 지켜지는 집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철이 들었을 무렵부터 자식 이기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아버지는 계속 이기셨고 나는 점점 불행해져 갔다. 아마 내가 글을 이렇게 끈덕지게 붙들고 있는 이유는 아버지를 넘어서서 스스로 생활을 꾸려나가려는 이유도 있다. 평범한 가정, 그러니까 대다수의 꽤 행복해 보이는 보통 가정과 비슷하게 자식이기는 부모 가정이 아닌 자식이 부모를 이긴 가정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자식들이 선생님이나 공무원을 하게 하려고 청소년기 시절부터 엄하게 교육을 시켰다. 나와 동생들이 속할 준거집단을 미리 자신이 정해 거기에 속하게 만들려고 하셨다. 하지만 우리 집 자식들 그러니까 나, 여동생, 남동생 모두가 아버지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만들어주는 판에 갇혀서 꼭두각시처럼 살았어도 지금보다 사정이 더 나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말을 듣는 것이 더 쉽고 편했을 수도 있다.
아버지를 넘어서기 위해 나는 나름대로 알게 모르게 부단히 노력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자식이 고생하기를 바라지 않는 마음에 자식의 성공까지를 거리를 최단거리로 만들어 주려고 하셨던 것 같다. 아버지 말을 잘 들었다면 지금보다 더 평탄한 길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원래 안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고 하지 않나. 하지만 나는 내 길을 간다. 벗어날 수 없이면 이길 것.
저 위의 구절을 내 식으로 바꿔 써보면 어떨까.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고, 불행한 가정도 모두 비슷한 이유로 불행하다."
행복한 가정은 부모가 자식에게 져주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고 불행한 가정은 자식이 부모에게 지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다. (이건 순전히 나의 삶을 투영한 내 기준이다.) 부모님들! 자식이 뭐가 하고 싶다고 하면 좀 들어주세요! 자식님들! 사소한 건 부모님께 져 주시고 자신의 뜻을 펼칠 때는 자신의 의지대로 하세요. 자식교육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적어도 본인의 준거 집단은 본인이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판단으로 자식이 속했으면 좋겠는 준거집단에 억지로 자식을 넣으려고 하면 안 된다. 오늘도 나는 글을 쓰면서 이김을 차곡차곡 쌓아 나가고 있는 중이다. 모든 걸 이겨, 언젠가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날을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