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실라 맥그리거 지음, 이현주 엮음,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과 성차별, 성폭력』, 책갈피, 2017
네 글은 '한결같이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끝난다'는 조언을 듣고 웃지 않을 수 있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후 글을 읽을 때마다 그 말을 한편에 놓고 질겅질겅 함께 씹었다. 그러다 '비평가들이 당신의 작품에서 싫어하는 점을 주의 깊게 기록했다가, 그 점을 더욱 함양하라(『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 中』)'는 데이비드 실즈의 말을 만났다. 함께 씹어 삼키기에 나쁘지 않은 식감이었다. 기껍게 삼켰다. 그의 말처럼 기승전'자본주의 or 신자유주의'로 반복되는 구조는 이름을 가리고 읽어도 '이광호의 글이다'라고 느낄 수 있는 특징으로 기능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모든 현상과 문제에 대해 똑같은 문제의식을 말만 바꿔가며 동어 반복하고 있지 않은가 항상 경계해야 한다. 뭉툭해진 칼로 환부를 도려내려 시도는 오히려 이곳저곳을 헤뒤집어놓고 감염 우려마저 남길 테니깐 말이다.
두서없는 이야기를 한 단락이나 풀어놓은 이유가 있다. 이 책은 노동자 계급 혁명에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을 모두 '후퇴'로 간주한다. 나는 '기승전자본주의비판론자'지만 그 주장에 거부감을 느꼈음은 물론 현실의 문제를 개선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남성 노동자가 여성 차별을 유지해 단기적 이익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남성 노동자가 자본의 지배를 유지하는 데 단기적 이익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다(p.99)'면서 이러한 주장은 '노동계급의 목표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삭제하는 것(p.99)'이라며 비판한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를 확률이 높고 더 많은 임금을 받을 수 있는 집단이나 개인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가? 장기적으로 혁명에서 멀어진다 하더라도 단기적으로 자신의 삶에서 확실한 이득이 주어진다면 그러한 선택을 할 수 있고 하고 있지 않은가.이러한 현실을 외면한 채 노동계급의 목표 달성으로만 해석하는 건 마르크스 이론에 대한 집착에 가깝지 않은가.
'여성을 때리고 살해하는 남성은 (압도적 다수가 권력에서 배제된 사회에서) 망가진 개인이다. 대다수 남성은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p.59)'는 주장 또한 위험해 보인다. 글쓴이는 '이런 망가진 개인을 남성 지배의 성공적 사례로 보는 것은 개인을 파괴하는 사회적 힘을 완전히 간과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이 '망가진 개인'을 딱하게 여겨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가해행위에 면죄부를 주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피해자는 있으나 가해자는 흐릿해지는 수많은 사건들을 보아오지 않았는가. 또한 그의 말처럼 '대다수 남성은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하면 이 문제에 '사회적 힘'을 운운하는 건 초점을 흐리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어떤 의도에서 꺼낸 이야기인지는 알겠으나 이를 설득력 있게 입증하기 위해서는 더 치밀한 보충설명이 필요하다.
물론 책에서 예를 든 '전쟁을 반대하는 시위에서 남성은 폭력적이기 때문에 군수물자 구입이나 전쟁 자체에 적극적이고, 여성은 반대로 온화하다면서 시위에서 모성을 강조하는 전략'을 취하는 것은 옳지 않다. 전통적 성역할을 거부하고 개별적 인간의 성향을 존중하고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프롤레타리아 계급 혁명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단기적 이득이 계급혁명에 반하는 행동이라고 주장해봐야 변화가 있을 리 없다. 장기적 이득 그러니깐 '혁명'의 가능성을 제로로 놓으면 눈 앞에 이익만이 적든 크든 이득이 된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노동자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간주할 수 있다면 차별을 유지하면서 노동자들이 득을 볼 수 없다는 점, 여성 차별 내에서도 여성의 계급에 따라 그 차별의 종류나 정도가 달라질 수 있음을 증명하는 내용은 주의 깊게 읽을만했다.
주장과 관계없이 편집은 좋았다. 각주 및 대괄호가 적절하게 사용되어 이해에 도움이 되었다. 번역 혹은 원문에서 생략되었거나 문맥상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경우 편집자가 대괄호로 보충설명을 해주었다. 예를 들면 '이것'으로 시작하는 문장 앞에 [성을 쉬쉬하는 사회적 분위기](p.57)라고 넣어주는 것. 이게 없으면 앞 내용을 다시 들춰보거나, 앞 내용에도 없는 경우에는 짐작해서 읽어야 하는데 잘못하면 오독의 소지가 있다. 이런 불편함을 독자 입장에서 생각해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만족.
2. 임승수,『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 시대의 창, 2018
원문과 함께 이해를 돕는 글이 실려있다. 원문을 아무리 꼼꼼히 읽는다고 하더라도 당시 시대상과 같은 배경은 따로 공부하지 않으면 이해하는 게 불가능한데 이러한 내용을 쉽게 설명해주고 있다. 제대로 알지 못하고 설렁설렁 넘어갔던 내용들에 대한 복습 차원에서 일독. 그럼에도 일부 개념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설명하는 정도에 그치기 때문에 이 책 한 권만으로는 부족하다. 노동자 계급의 단결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그 안에서 파괴되는 소수 노동자의 삶이 쉽게 간과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남았고, 공산주의자 동맹을 알리는 내용에서는 엘리트주의의 냄새가 났다. 오늘날 공산당 선언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당연히 없겠지만. 다음엔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을 읽을 차례.
3.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안남규 옮김, 『왜 우리는 계속 가난한가?』, 동녘, 2019
모 의원이 부정청탁 관련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에 모 의원에게 사과를 요구하던 청년 정치인은 관계자들에 의해 저지당했다. 지지자로 추정되는 시민은 청년 정치인에게 "야 집에 가서 공부해, 공부해서 취직해, 야 공부하라고"라고 말했다. 그곳에서 '집에 가서 공부해라. 공부해서 취직해라'라는 말은 분명 비난과 조롱의 언어로 쓰이고 있었다. 그, 혹은 이 사회가 고용되어 있는 상태를 정상, 실업은 비정상이라고 전제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우리 사회는 '잉여'에 대한 분노나 혐오 혹은 두려움이 강하다. 전통적인 노동윤리는 '일하는 것은 선이고, 일하지 않는 것은 악(p.16)'으로 간주했다. 시대가 변하면서 노동자들을 노동에 전념하게 하려는 전략 은 계속적으로 바뀌었다. 심지어는 일하지 않는 빈자들에 대한 생활수준을 최악으로 만들어 아무리 힘들고 위험하며 가치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일을 해야만 생존이 가능하도록, 그러나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생활이 개선될 수는 없는 정도의 임금을 주어 노동 상태를 유지하도록 했다. 그러나 사회는 변화하고 있다. 노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국가가 시민에 대한 권리로써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하는 것을 선언하면서 기존의 노동윤리의 신성성은 무너졌다.
"집에 가서 공부해, 공부해서 취직해"라는 말은 전통적 노동윤리에 대한 호소다. 그러나 전통적인 노동윤리가 아닌 권리와 존엄으로써의 복지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이러한 호소는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소비자 사회'는 우리가 소비하고 지출하는 것에 의해 그 사람을 규정하고 가치를 생산한다. 그러니깐 쏟아지는 상품들 사이에서 자신의 취향에 따라 '선택'하는 '소비자'가 시민의 권리를 다 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복지는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며 국가에 의해 동일한 급여를 지급받는다는 점에서 소비자 사회의 경향과 상충된다. 그러니깐 "집에 가서 공부해. 공부해서 취직해"라는 말은 다시 힘을 얻는다. 개인이 전통적인 노동윤리를 거부한다 하더라도 노동자가 아닌 소비자로서의 가치. 그러니깐 돈을 쓰고 소비해서 자본의 성장에 기여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니게 된다. 그래서 영상을 보다 나도 데미지를 입었다.
선언
덜 쓰고 덜 벌겠습니다
이미 소비의 달콤함을 맛본 몸
악마는 매 순간 찾아와 유혹한다.
이 기타를 봐. 예쁘지 않니? 네가 기타를 못치는 건 장비가 안 좋아서야. 어서 새 기타를 사
베이스가 잘 안들린다고? 이어폰이 안 좋아서 그래
돈이 없다고? 그럼 일을 해야지. 너도 떳떳한 사람이 되어야지
기도한다
신이시여. 계십니까
악마는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왔습니다
신이시여. 계시다면 응답해주시옵소서
최소한으로 일하고
최대한으로 소비할 수 있는 기적을 행해주시옵소서
오병이어의 기적은 없었고
째깍째깍
노동윤리로 정신을 무장하고 몸바쳐 취업을 준비해야 할 시간
4. 장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 창비, 2019
20~30대의 젊은 직장인이 등장하는 명량한 회사원 소설입니다. 한국문학에서 종종 등장하는 쓸데없는 자의식 과잉도 없구요. 경쾌한 리듬으로 노동의 하루들이 흘러갑니다. 좋아요. 좋습니다. 어떻게 좋은지는 좀 더 꼼꼼히 읽고 따로 글을 쓰겠습니다.
5. 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 창비, 2019
차별은 차별하지 않고 있다는 생각에서 온다. 나의 위치를 고정시키는 순간 위계가 발생한다. 선의의 행동을 할 때에도 자신은 우위를 점한 채 호의를 베풀기를 원한다면 그건 시혜적 태도에 가깝다. 차별하지 않는 삶은 불규칙적으로 파도치는 갑판 위에 서 있는 것과 같다. 어디서 파도가 치는지 항상 주위를 살피면서 내 중심이 어디 있는지도 파악해야 한다. 요동치는 파도에 따라 유동적으로 움직여야만 간신히 '중립'을 유지할 수 있다. 고단하고 피곤한 일이겠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한 자리에 잘 서있다고 흔들리는 배와 파도를 외면한 채 흔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왜 저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냐'라고 해버리면 그건...
6. 히로세 준 지음, 김경원 옮김,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 바다출판사, 2013
자본에 충실하는 삶과 자본의 파괴를 시도하는 삶의 괴리를 용납할 수 없어 괴로웠다. 그러나 혁명이라는 건 아침엔 동부에 나가 댐을 건설하고, 저녁엔 서부에 나가 댐에 균열을 내는 것처럼 동시에 여러 삶을 살아나가려는 태도를 견지하려는 것에서 온다. 노동/실업, 두 가지 선택지만 보이지만 하나만 선택한 뒤 충성해야 하는 건 아니다. 그 안에서도 무슨 일을 할 것이고, 일 해서 번 돈을 어떻게 소비할 것인가. 소비의 목적은 무엇인가. 등 선택지는 무수히 많다. 살기 위한 노동(조금 더 정확히는 소득)을 하면서도 자본의 바퀴에 조금씩 바람을 빼려는 시도는 불가능한 게 아니다. 물론 그런 내 모습이 현실에 타협해버렸거나 개량 주의자로 변모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지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조금씩 모이면 언젠가는 보조바퀴 하나라도 주저앉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자본이 굴러가는 속도는 너무 빨라 따라가기에도 조급한데. 바퀴에 바람을 넣는 시간 정도는 벌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들게 한 '봉기'를 키워드로 한 일종의 영화비평. 가볍게 읽을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