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압된 과거가 오늘의 나를 흔들지 못하도록
전반적인 인간관계에서 저는 회피-혼란-공포를 모두 느낍니다.
회피
저는 인간관계가 너무 많아지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연락도 자주 하는 편은 아닙니다. 세계를 이해하거나 저의 감정을 탐구하는 것에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만날 시간을 정해놓고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낫습니다.
공포
사람이 무섭습니다. 나를 비난하지는 않을까, 내 실수를 알아차리지는 않을까, 나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까, 나를 거부하지는 않을까, 나쁜 사람이지는 않을까 고민합니다.
혼란
그럼에도 사람이 고플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있고 싶고 대화를 하고 인사를 나누고 싶습니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이해를 받고 싶다는 감정이 듭니다. 하지만 그래 놓고도 공포를 느끼기 때문에 회피합니다. 한 발 다가오면 두 발 물러섭니다.
죄책감을 느꼈거나, 수치스러웠거나, 자책하게 되었던 순간들을 떠올립니다.
1. 유치원 때였습니다. 집에 가는 버스를 타기 직전 의자를 책상 위에 모두 올려놓았습니다. 어쩌다 의자가 떨어졌고 그 의자에 머리를 맞았습니다. 학기 초라서 서로 얼굴과 이름을 모를 때였고, 한 아이가 "얘 울어요"라고 했고, 선생님은 "누가? 왜?"라고 했고, "의자에 맞았나 봐요. 이름은 모르겠어요"라고 했습니다. 그때 저는 제 이름을 직접 말하는 건 자존심이 상하고 그렇다고 말을 안 할 수는 없어서 가방을 번쩍 들어 책상 위에 올렸습니다. 가방에 제 이름이 크게 쓰여있었거든요.
2. 마찬가지로 유치원이었습니다. 집에서 밥을 싸오면 반찬은 유치원에서 줬습니다. 반찬으로 꽈리고추 멸치 볶음이 나왔고, 저는 고추는 빼 달라고 했습니다. 근데 선생님이 핀잔을 주면서 그런 거 없다고. 다 먹으라고 말했습니다. 편식하지 말라는 의미였겠지만 당시에는 수치스러웠습니다. 제가 잘못된 요구를 한 거 같았거든요. 그 이후로 편식은 안 했지만 그 감정은 남아있습니다.
3. 집에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앞 학우가 도발을 하더군요. 너 이거 못 먹지? 하면서 풀잎을 가리켰습니다. 그게 왜 그렇게 기분이 나빴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지기 싫어서 풀을 뜯어 꼭꼭 씹어 삼키고 입을 열어 다 먹었다는 걸 보여줬습니다. 그 아이는 뜨악한 표정을 짓더니 아무 말 없이 버스를 기다렸습니다. 약하게 보여서는 안 되다는 심리가 있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4. 새벽.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티브이를 켜놓고 허공을 응시했습니다. 방청객의 웃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을 거고, 아버지는 지난날의 아버지를 용납할 수 없었을 겁니다.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처럼 다른 인격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다른 사람이었으니깐요. 저는 그 장면을 바라보며 다음 날에도 학교에 가고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제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내가 미친 게 아닌가 싶었죠.
5. 초등학교 입학 하루 전이었던 거 같습니다. 그날도 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들어왔습니다. 친척 형이 집에 와서야 진정이 되었죠. 저는 쉽게 잠들지 못했고, 친척 형은 자야 할 시간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저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갔습니다.
6. 어머니는 몇 시간씩이나 창 밖으로 아버지가 오시는지를 확인했습니다. 보이면 '저기 온다'라고 하셨습니다. 술을 많이 드시지 않았으면 안심했지만 그런 날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 기다림은 새벽까지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저에게는 먼저 자라고 했지만 저도 마찬가지로 쉽게 잠들 수 없었습니다. 그 시간이 너무 무서워서 덜덜 떨었고 작은 소리에도 긴장했습니다. 어머니와 저는 집에 있는 위험한 물건들을 숨겼습니다. 어느 날은 칼을 들고 죽이겠다고도 했습니다. 저는 그 날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작은 소리와 날카로운 것(칼이나 주사)에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주사 맞는 걸 눈으로 볼 수 없고, 칼을 쓰는 사람을 보면 다칠까 봐 두렵습니다. 사람들의 말소리나 청소기 소리에도 신경이 날카로워집니다.
7. 아버지는 핸드폰을 일찍부터 가지고 다녔습니다. 아래쪽이 반만 열리고 액정이 초록색이었던 시절부터 말이죠. 아버지가 퇴근하실 시간이 지나도 집에 오시지 않으면 어머니는 전화를 했는데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며, 삐 소리가 난 후에는 통화료가 부과됩니다.라는 메시지가 들릴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전화를 해보라고 하셨거든요. 그래서일까요. 저는 지금도 전화 거는 게 무섭습니다. 주문도 잘 못합니다.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간신히 합니다. 상대방이 어떻게 말할지, 내가 어떤 말을 할지 미리 준비해야만 전화를 합니다.
8. 전화도 받지 않고 집에도 오시지 않아 회사 동료분에게 전화를 걸어 찾아갔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나를 보고 버럭 화를 냈습니다. 왜 왔냐고 고성을 질렀습니다. 찾아간 게 잘못이구나, 연락한 게 잘못이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 날 이후로 아버지와 연락하는 게 두렵습니다. 전화가 걸려오면 떨립니다. 언제 오시냐는 연락을 하는 것도 부자연스럽습니다. 다른 사람과도 마찬가지입니다.
9. 중학교 때였습니다. 별로 친하지 않은 학우 하나가 등교 길에 저를 불렀습니다. 담배를 피우자고 했습니다. 주변에는 다른 아이들도 있었고 저는 거절하지 못해 담배를 폈습니다. 담배를 피우고 싶었던 것도, 그 친구와 친했던 것도 아닌데 제 감정을 표현하고 거절하는 법을 몰랐던 겁니다. 저는 학교에 도착해 창문을 열고 한숨을 쉬었습니다. 옆에 있던 친구는 담배 폈니?라고 물었고 저는 아무 말 못 했습니다. 죄책감과 무력감에 빠졌습니다.
10. 사립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당시에는 체벌이 가능했고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체벌을 자연스레 여겼습니다. 제게 교실은 위계와 폭력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공부를 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어 보였습니다. 비교육적인 환경에서 교육을 논한다는 거 자체가 위선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자율이 아닌 강제되는 자율학습에서도 무력감과 공포만 느꼈습니다. 하루는 가족과 외식을 하러 가는 중이었고 저는 너무 힘들어서 자리에 멈춰 주저앉았습니다. 가족은 모두 가던 길을 가기 바빴습니다. 아무도 바라봐주지 않았습니다. 힘들다는 말에 빨리 오라고 했습니다. 가족도 날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전 얼마 후 난치성 면역질환에 걸렸고 지금까지도 치료 중에 있습니다.
11.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저는 양복 한 벌이 없어서 검정 바지에 흰 셔츠, 양복 비슷한 재킷을 입었습니다. 수치스러웠습니다. 어머니께서 양복 한 벌 때쯤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하셨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산 옷이 있습니다. 롱 패딩이었는데 같은 디자인에 사이즈만 달랐습니다. 제가 입고 다니는 걸 보고 어머니도 하나 주문해달라고 하셔서 구매해드렸습니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병원에 가며 같은 옷을 입었습니다. 그랬다가 저는 어머니랑 같은 옷을 입는 게 창피해서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마지막 날 어머니는 그 옷을 입고 계셨습니다. 유품으로 그 옷을 받아 들고 저는 펑펑 울었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사랑하셨는데 저는 어머니를 부끄러워했다는 게 너무나 죄스러웠습니다. 그 날 손 한 번 잡아드리라는 장례지도사의 말에도 저는 손을 잡지 않았습니다. 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죽음을 인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납골당에도 한 번 찾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로부터 3년간 검은 옷만 입자고 결심했습니다. 어머니를 보낸 자식이 예쁜 옷을 입고 화려한 옷을 입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12. 어머니께서 집을 나갔던 날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술을 마시고 오셨던 날입니다. 어머니가 현관문 밖으로 나가버리고 저는 펑펑 울었습니다. 버려졌다는 생각에 당황스러웠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현관문만을 바라봤습니다. 초등학생 때였던 거 같네요. 아버지는 어머니를 찾지 말라고 했고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그날도 잠에 들 수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어머니가 돌아오실지 몰라 조용히 현관문으로 가서 보조장치를 풀어뒀습니다. 다행히 어머니는 새벽에 돌아오셨습니다. 저는 모르는 척, 자는 척했습니다. 얼마 뒤 이모와의 통화에서 어머니는 집을 나갔지만 갈 곳이 없어 공원 벤치에 계시다가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나가도 갈 곳 없는 상황이 비참했다고 하셨습니다. 차라리 돌아오시지 않았다면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제가 페미니즘에 관심을 보이는 게 이 지점과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관계에서 불안을 느끼는 것도 아마 관련이 있을 겁니다.
13. 사람과 눈을 못 마주칩니다. 자존감이 낮습니다.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올 때마다 눈을 마주치면 건방지다, 자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의 눈을 보는 게 잘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걸을 때 땅을 보고 걷고, 대화할 때 억지로 눈을 마주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눈을 보지 못합니다.
14. 기대했던 상위권 대학에 못 갔습니다. 서울에 있는 학교에 가기는 했지만 유명한 학교는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는 큰 이모와의 전화에서 실망감을 드러냈고 저는 그 통화를 들으며 스스로에게 실망했습니다. 투입한 돈과 시간에 비해 부족한 결과를 낸 거 같다는 생각에 우울했습니다. 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아싸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했고, 사람들과의 만남을 피했습니다. 1학년 때 하는 새터도 안 갔습니다. 물론 이후에 학생회나 편집부 활동을 했지만 그 안에서도 필사적으로 사람을 피했습니다. 장학금을 받으려고 전 과목 A+를 받겠다는 다짐을 했으나 쉽지는 않았습니다. 완벽을 추구하다 보니 높은 학점을 받아도 항상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부적절감을 느꼈습니다. 한 과목 제외 모두 A+를 받았을 때도 한 과목을 못 본 거에 자책했습니다. 완벽과 강박 성향이 언제부터 생긴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15. 중학생 때였습니다. 한 학생이 나에게 옷을 사라고 했습니다. 필요 없다고 했으나 그럼 다른 걸 사라고 했습니다. MP3가 있다고 했습니다. MP3를 갖고 싶다고 생각하긴 했으므로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조금 비싼 가격이었지만 수제 MP3라고 해서 샀습니다. 한동안은 잘 듣고 다녔습니다. 근데 세상에 수제 MP3가 어딨습니다. 알고 보니 저가의 기계였고 저에게 사기를 친 거였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너무 화가 나 드라이버를 들고 와서 쿵쿵 찍어 액정을 부숴버린 뒤 창 밖으로 던져버렸습니다. 믿을 놈 하나 없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친구도 팔아먹는다. 그리고 난 거절도 못하고 쉽게 속는 멍청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어갔습니다.
16. 기절놀이를 하자고 했습니다. 제가 기절당하는 쪽이었고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운동장 구석에서 의식이 흐려지는 걸 느꼈고, 뺨을 몇 대 맞고서야 일어났습니다. 저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재미있는 척했지만 하나도 재미없었습니다. 친구라는 게 이런 건가. 집에서 걱정하지 않으려면 이런 식으로라도 친구들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 같습니다. 왕따를 당하거나 심한 폭력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학창 시절은 이런 식이었습니다. 즐거운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
이런 기억이 이십 대 중반이 되어서야 다시 떠올랐습니다. 충격적인 사건을 겪고 나서 제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면서 억압해왔던 사건들을 재발견했습니다. 어린 시절의 제가 감당할 수 없었던, 변화시킬 수 없었던 사건들이 오늘날의 저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이유도 모른 채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스스로에게 상처 입히고 있었습니다. 저와 함께 했던 사람들에게 너무나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그래서라도 저는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살겠습니다. 이 우울을 극복하고야 말겠습니다. 조금 더 성숙해지겠습니다. 저의 미성숙함을 우울로, 과거의 상처로 두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