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가방은 항상 무거웠습니다. 혹시나 만나기로 한 사람이 늦었을 때 펼쳐 볼 책 한 권, 메모를 해야 할 상황이 있을지 모르니 몇 자루의 필기구와 종이, 안경이 파손되면 곤란하니 여분의 안경, 일정을 확인하기 위한 다이어리, 기타 치기 전 깜빡하고 정리하지 않았을 수 있으니 손톱깎이도 들고 다녔습니다. 휴지나 물티슈, 안경닦이 같은 건 기본이었죠. 돌발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수업시간이었습니다. 가방을 아무리 뒤져도 필통이 나오질 않는 겁니다. 전 날 저녁 무언가를 쓰다가 책상 위에 놓고 온 거죠. 그 순간부터 저는 자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멍청이. 필통 하나 제대로 못 챙기다니. 이런 것도 못 하면서 뭘 하겠다고. 하면서 말이죠. 불안과 짜증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선택해야 했습니다. 필기구 없이 수업을 들을 거냐, 아니면 주변 사람에게 빌릴 거냐. 갈등 상황에서 초조함을 느꼈습니다. 제 사고방식에 따르면 다른 사람에게 손을 벌리는 행위도, 수업을 필기도 하지 않고 대충 듣는 것 둘 다 불가능한 일이니깐요.
몇 분을 고민하다 결정했습니다. 필기구를 빌리기로요. 옆 사람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죄송한데요, 펜 하나만 빌릴 수 있을까요?"
그러자 그 분은 흔쾌히 펜을 꺼내 빌려주셨습니다. 심지어 펜이 잘 나오는지 본인 노트에 확인까지 하면서 말이죠. 덕분에 저는 수업을 잘 들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뒤에 앉은 분에게 펜을 빌려달라고 하니
"샤프도 괜찮으세요?"
하며 샤프를 빌려주셨습니다. 잘 쓰고 수업이 끝나고 돌려드렸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에게 부탁 하는 상황이 싫었던 겁니다.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기 위해 가짜 독립심을 키웠던 겁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혼자 살아남을 수 있도록 휴지, 물티슈, 안경닦이, 여분의 안경, 손톱깎이, 필통, 다이어리, 책 한 권, 필기구 등 많은 걸 챙겨 다닌 겁니다. 그럴수록 제 껍질은 점점 단단해졌겠죠. 밖에서도 들어올 엄두를 못 내고, 저 스스로도 밖으로 깨고 나갈 생각을 안 했던 겁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이 저를 거절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은 제가 실수를 할 때, 완벽하지 못할 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렇게 서로 조금씩의 도움을 주고 받고, 실수하고, 잘못하고, 사과하고, 상처받고, 상처 주면서 살아가는 거였습니다.
참 별 거 아닌 일에도 벌벌 떨면서 살았구나 싶습니다. 책상 위에 놓고 간 필통이 저를 조금 더 인간답게 만들어 준 하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