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은 문제에는 동그라미 치기
아카데미에서 작,편곡을 배우기 시작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나이도 있는데 시간만 허비하는 거 아닐까. 괜한 치기로 시작했다가 이도저도 아니게 되면 돌이킬 수 없는데. 걱정이 앞섰다. 이미 전공을 하고 왔거나 버클리 유학을 위해 입학한 사람들 사이에서 불안은 더 커졌다. 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 회피 패턴이 작동하자 온갖 핑계거리가 떠올랐다. 이건 돈 낭비고 시간 낭비니깐 그만 하자고. 음악은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느끼는 거다. 사기당하는 거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취직 준비 하자고.
정말 그런가? 알 수 없다. 해보지 않고서는. 새로운 시도, 새로운 사람.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무서워서 피하려는 거다. 내 방어기제다 .다른 사람의 비난이나 판단, 실수의 가능성 자체가 없을 때에서야 안정감을 느낀다. 혼자 있는 게 편하다고 착각한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과 연결되기를 지독하게 바란다.
기초부터 하나씩 시작했다. 음정 연습부터. 문제를 풀면서 하나 하나 정답을 체크하며. 익숙하지 않아 한참 머리를 싸맸다. 그럴 때마다 핸드폰을 보거나 웹서핑을 하려 하거나, 잠을 자려고 했다. 내가 좌절감을 느낄만한 상황을 회피하기 위한 본능적인 행동이다. 학습된 무력감 때문이다. 나는 못할 거라는 신념. 그래서 더 이를 악물고 했다.
나는 동그라미를 치지 않았다. 틀린 문제만 빨간 펜으로 표시하고 왜 틀렸는지 다시 확인했다. 한 문제라도 틀리면 자책했고, 다 맞으면 그건 당연한 거였다. 기본값이 다 맞는 것. 다시 좌절감이 조금씩 쌓였다. 뭔가 이상했다. 왜 나는 동그라미를 안 치지. 맞은 거는 객관적으로 표시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내 가치관에는 다 맞는 게 기본값이기 때문이다. 틀린 건 기준에서 벗어난 것이므로 표시. 이제 그러지 않기로 했다. 맞은 건 맞다고 동그라미 치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것.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나씩 하면서 내 자신을 너무 채찍질 하지 않기로. 그렇게 한 발씩 나가기. 현재에 집중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