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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호 Sep 09. 2020

강박에서 벗어나기_01

언젠가 필요할지도 모르잖아?

아브라함은 강박성 성격자가 내면에 강한 양가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겉으로 질서정연하고 잘 정돈되어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것이 무질서함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강박성 성격자가 자신의 물건을 버리기 어려워하며 소유물에 집착하는 것에서 쾌감을 느끼고...(후락) 

- 민병배, 이한주, 『강박성 성격장애』, 학지사, 2016, p.95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듣기를 거부했다. 번거롭더라도 디바이스에 MP3 파일을 넣어서 노래를 들었다. 뮤지션들에게 노동의 대가가 조금이라도 더 배분되는 방식을 택한 것이기도 했지만, 음원을 소장해야 한다는 강박도 있었다. 재난이나 천재지변으로 인터넷을 쓸 수 없게 되면 스트리밍을 할 수 없으니깐. 혹은 스트리밍으로 산업이 재편되면 음원 유통사가 일방적으로 가격을 올리거나 수익 배분에서 횡포를 부릴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노래는 듣기라도 하지. 글쓰기 관련 강박은 점점 심해졌다. 책 한 권을 이해하기 위해 작가의 책을 다 사거나, 문학상 수상작을 읽기 위해 최근 몇 년의 수상집을 모았다. 텍스트를 읽고 비평하는데 도움이 된 건 사실이지만 글 하나를 쓰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 모르는 게 하나라도 있거나, 불확실하다고 여겨지는 사실이 하나라도 생기면 그걸 검증하기 위해 과도한 노력을 쏟았다. 논문을 내려받고 정리하다가 밝아오는 아침을 맞이한 적도 있었다. 정작 써야 할 글은 마감이 하루 이틀 남은 상황에서 후다닥 쓰다 보니 항상 아쉬움이 남았다.


당연히 다 못읽었다

읽어야 할 책, 논문은 점점 쌓여만 갔다. 읽는 과정이 언제부턴가 고통이 되었다. 빨리 읽고 써야 하는데. 하나라도 더 이해해야 하는데.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끝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시작하기가 힘들었다. 어차피 오늘 시작해도 다 못할 텐데 나중에 해야지. 그러면서도 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은 가시지 않았다. 그러면서 더 완벽해지기를 바랐다.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생각을 버리기로 했다. 언젠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완벽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말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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