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씩 하나씩 풀다 보면
우울한 사람은 어떤 일을 시작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어 해야 할 일을 자꾸 미루고 지연시키는 일이 반복된다.
- 권석만,『우울증』, 학지사 , 2019, p.25
방 안을 둘러보았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잘 정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네 싶었다. 하지만 속은 엉터리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필요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모아 왔으나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것들로 가득 차있었다. 한 번 정리해야지 생각은 했다. 생각만 하고 계속 미루고 미뤄왔다. 나중에 해야지. 내일 해야지. 오늘은 쉬어야지.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지금 안 하면 또 안 하겠지. 그래, 바로 지금 버리자. 다시 공부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모아 왔던 수업자료부터 꺼냈다.
박스에서 모두 꺼내니 양이 상당했다. 하나씩 펼쳐보면서 다시 볼만한 가치가 있는지 훑어보았다. 5권에서 건진 건 50장도 되지 않았다. 나는 쓸모없는 자료를 언젠가 필요할지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에 길게는 8년에서 짧게는 1년 동안 보관하고 있었던 거다.
마침 분리배출을 하는 날이어서 붙여놓았던 메모지와 스테플러심을 제거했다. 제본된 자료는 스프링과 플라스틱을 분리해 배출했다. 손이 아팠지만 착한 강박은 유지하기로 했다.
거리두기 2.5단계로 외출도 못 하는 지금이야말로 죄책감 없이 정리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몇 년간 한 번도 입지 않았으면서 입을지 모른다, 아깝다, 비싸다는 이유로 모아뒀던 옷들도 하나씩 꺼냈다. 우리 집이 아니니깐. 이사 가면 정리해야지. 하면서 미루기만 했었는데. 꺼내놓고 보니 정말 안 입을 옷이라는 게 명백했다.
수납도구를 사러 가는 길은 또 왜 이리도 힘들던지. 다음에 할까라는 생각이 수십 번 들었지만 일단 발걸음을 옮겼다. 용품을 사는데 돈이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돈도 안 버는데 이걸 사도 되는 걸까? 괜히 소비하는 거 아닐까? 이러다 우리 집 망하면 어떻게 하지? 돈 없다고 하면 친구들도 싫어할 텐데. 아무도 안 만나주겠지. 그럼 나는 혼자가 되고... 그러다 쓸쓸히 죽게 될 거야. 아니 죽을 용기도 없어서 죽지 못하는 삶을 살겠지. 하는 극단적인 사고방식이 또 올라왔다. 그래서 새콤달콤한 젤리도 같이 샀다. 이거 하나 더 산다고 인생 안 망한다.
그래 이게 사람 사는 거지. 지금까지 내가 많이 힘들었구나. 움직일 힘도 없었구나 싶었다. 청소를 할 에너지도, 정리를 할 에너지도 없었던 거다. 어차피 살고 싶다는 의지가 없는데 청소가 무슨 소용이고 밥이 무슨 소용이었겠는가. 그냥 누워서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든데. 그래도 오늘은 하나 했다. 아직 꼬여있는 것들이 많지만 하나씩 풀다 보면 조금은 나아질지도 모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