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광호 Nov 30. 2020

이발기가 무서워요

다시 상처 받을까 봐 상황을 피하게 돼요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다 두피에 상처가 난 적이 있습니다. 조금씩 튀어나온 옆머리를 다듬다가 이발기 날이 피부에 닿아버린 거죠. 깜짝 놀라서 고개를 피했더니 미용사님도 놀라 왜 그러냐고 했습니다. 


  "상처 난 거 같은데요?"


  했더니 아니라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했습니다. 저는 분명히 통증을 느꼈지만 아무리 봐도 멀쩡하다고 해서 다행히 상처는 안 났나 보다 생각했죠. 그런데 미용사님의 손이 뒤늦게 바빠졌습니다. 두피에 상처를 발견하고 연고를 발라주시고 밴드를 붙여주며 병원에 가 보라고 했습니다. 병원비도 다 부담할 거니깐 무조건 다녀오라고요. 며칠 지나니 저절로 아물어서 병원은 안 갔습니다. 큰 상처는 아니었으니깐요.


  문제는 그날 이후부터 생겼습니다. 이발기 소리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왼쪽 귀 주변을 다듬을 때는 몸서리쳐질 정도로요. 오늘만 지나면 괜찮겠지 했습니다. 근데 몇 달이 지나도 똑같은 겁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에는 제가 떨고 있는 게 느껴질 정도로 무서워하고 있더라고요. 아랫배가 당길 정도로 힘을 주고 있어서 '내가 긴장하고 있구나' 싶어 작게 심호흡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래 다칠 수도 있어. 하지만 그게 엄청나게 위험하거나 아픈 건 아니잖아.' 하며 스스로를 다독였습니다. '괜찮다'라고 말하지 않고요.


   상처 받았던 경험은 그런 겁니다. 객관적인 상처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느낀 상처가 깊고 크다면 그 상처는 중요한 겁니다. 트라우마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몸은 비슷한 상황을 피하도록 설계됩니다. 상처를 받을 수 있다고 느껴지는 상황이 되면 즉각적으로 신호를 줍니다. 몸이 굳거나, 혐오감이 느껴지거나, 화가 나거나, 공포를 느끼는 등으로 말입니다. 맹수를 마주친 초식동물, 혹은 도로에서 전속력으로 다가오는 자동차를 지척에서 발견한 순간처럼요. 


   유독 피하고 싶은 마음이 반복되는 상황이 있다면 살기 위해 몸이 보내는 신호가 아닌지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상처를 받아들이세요. 본인이 느끼는 상처의 크기와 깊이는 다른 사람이 평가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발기에 다쳐봐야 금방 아물 거라는 거, 그리고 그런 일이 지금까지 몇 번 없었다는 걸 저도 머리로는 압니다. 근데 무서운 걸 어쩝니까. 제 감정을 이성으로 통제할 수는 없었습니다. 통제하려는 욕구에서 벗어나 '무서웠구나, 아팠구나' 생각하고, 무섭지만 머리를 또 자르고 자르기를 반복하며 '머리를 다듬는다고 귀가 잘리는 건 아니구나!'라는 걸 머리가 아닌 몸으로 깨달으면서 이제는 조금 나아졌습니다.  


  의자를 최대한 높여도 키가 닿지 않아 키높이를 하고 앉던 어린 시절. 그때랑 다를 바 없는 셈입니다. 그땐 이발소에만 가면 울었습니다. 서걱거리는 가위의 금속성과 이발기의 굉음이 무서웠거든요. 그게 나에게 상처를 줄 것만 같았습니다. 미용실 사장님은 본인 손에 이발기를 대면서 상처가 나지 않는다는 걸 강조했지만 그건 아무 상관없었죠. 다칠 수 있다는 공포는 내 안에 있는 거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애써 증명하려 해도 내 안에의 공포를 몰아낼 순 없었죠


  그런 제가 머리를 자르는 동안 눈에 힘을 줍니다. 누가 머리를 만지면 잠이 쏟아지거든요. 이제는 이발기가 무섭지 않은 겁니다. 그게 나에게 상처를 주지 못한다는 걸. 혹여나 상처가 난다 하더라도 그 정도의 작은 상처는 이겨낼 수 있음을 아니깐요. 해보지 않은 일. 무서웠던 일. 그것들에 기꺼이 부딪히면서 별 거 아니라는 걸 알아가는 것. 혹은 별거라 해도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하고 싶은 일이라면 기꺼이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것. 그게 어른이 되는 과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도전을 즐기라는 말은 두려움을 익숙한 것으로 만드는 과정을 즐기라는 것과 비슷한 거겠죠?

매거진의 이전글 불안, 우울에 도움이 되었던 영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