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광호 Feb 12. 2021

보이지 않던 존재가 나의 일상을 흔들어 놓을 때

  4호선 서울역에 도착한 뒤에야 장애인 단체의 시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와 비슷한 입장의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플랫폼을 가득 채웠다. 연착과 지연을 반복하는, 평소보다 느린 지하철을 타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일정을 마치고 다시 돌아올 때는 개찰구마다 ‘시위가 있으니 다른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환불을 원하는 경우 역무실로 문의 달라’는 내용의 A4용지가 붙어있었다. 퇴근시간이라 다른 선택을 하더라도 오래 걸리는 건 마찬가지일 거 같아 지하철을 탔다. 시위는 종료되었지만 지하철 창문에 ‘장애인버스 증차계획 이행하라!’라는 문구는 남아있었다.


  뉴스를 통해 소식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응원과 지지의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도 있었지만, 시위가 오히려 장애인들에 대한 인식을 나쁘게 만들었고, 장애인의 권리를 주장하려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시위로 인해 불편을 겪은 사람 중에는 장애인들을 절대 지지하지 않을 것이며 앞으로의 활동을 적극 방해하겠다고 선언하는 일부의 사람도 있었다. 그렇지만 본인이 차별을 하고 있다거나, 차별을 원한다는 사람은 없었다. 장애인을 차별을 원한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이동권을 비롯한 장애인의 권리는 여전히 차별받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평소에 정시 출발, 정시 도착에 가까운 지하철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었던 건 장애인들이 지하철을 이용할 권리를 사실상 제한한 상태로 지하철을 운영해왔기 때문이다.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것이 열차의 지연과 승객의 불편으로 이어지는 것은 장애인의 열차 이용에 필요한 시설 및 시스템이 충분히 갖춰져 있지 않다는 반증과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정시 출발 정시 도착은 ‘일상’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그 상황에 변화가 오면 ‘운행 지연’, ‘불편’과 같은 말을 쓴다. 하지만 대중교통은 비장애인만을 위한 시설이 아니다. 탑승 제한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면 모든 시민이 사용할 수 있다. 지하철을 타는 장애인이 아니라, 저상버스, 엘리베이터와 경사로, 리프트 등의 시설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우리 사회가 문제다.


  지금껏 유보되었거나 유보하기를 강제했던 권리가 행사될 때, 이를 불편으로 여기는 사람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기존에 누리고 있던 권리가 전적으로 나의 것이 맞는지, 혹여라도 다른 사람이 권리가 오랜 시간 동안 감추어져 있어 없는 것이라 여기게 된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는 권리의 행사로 인한 충돌이 있을 때마다 새롭게 행사되(-된다고 여겨지)는 권리 혹은 그 존재 자체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사회를 유지시키려 하였기 때문이다. 너만 가만히 있었으면 됐는데 왜 나서서 난리냐, 다른 사람들이 불편하게 하지 말고 조용히 있어라, 조금씩 나아지고 있으니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관심이 없던 사람도 설득할 수 있어야 효과가 있지 않겠냐, 지금 나서면 오히려 반감만 생긴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누군가의 존재를 지금 당장 드러내지 못하게 하고, 권리를 제한함으로써 권리의 충돌을 막았다. 그렇게 나의 권리를 유지했다.


  지하철 지연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의 존재와, 피해 사실은 분명 존재한다. 면접이나 시험 등의 중요한 일정에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고, KTX 탑승 등 시간 조정이 불가능한 일에 차질이 생겼을 수도 있다. 퇴근 혹은 출근, 하교 시간이 길어지고, 약속에 늦은 사람도 있었을 거다. 더 위급한 상황에서 지하철을 이용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각자가 느낀 불편함이라는 감정과 지연 그 자체는 부정할 수 없고, 다른 불편함과 경중을 따지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한 번의 불편함이라 해도 중대한 사건이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피해를 본 사람 입장에서는 불편을 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줘야 하고, 지지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며, 잠시의 불편함은 감수하라는 말 또한 강요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무관심은 사회의 변화를 지연시켜 장애인들이 다시 시위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유지시킨다. 장애인들의 이동권이 보장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장애인들은 시위를 할 수밖에 없다. 장애인의 대중교통 이용이 사망사고로 이어질 수준의 시설과 시스템은 그대로 두고 장애인들에게 불편하지 않은 방식을 택하라는 말은 ‘나오지 말라’, ‘눈에 띄지 말라’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장애인이 주변에 없다면 그건 장애인이 정말 없어서가 아니라 나의 주변 세상이 장애인에게 불편하거나 위험한 공간이거나 공동체라는 증거다. 2018년 기준 장애인은 251만 7천 명으로 국민 전체 인구의 5%에 달한다.


  설 직전이라서, 퇴근시간이라서 동의할 수 없다는 의견들도 보인다. 고향에 내려가야 했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던 시간이라는 것이다. 이는 비장애인만 해당하는 건 아닐 것이다. 장애인도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집으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하고, 그 당연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의 이동이 다른 누군가의 이동을 제한하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 누구도 지하철을 이용했다는 사실로 비난받지 않고, 타인에게 이해를 구하지 않고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피해 받는 존재가 없어야 한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동권의 자유를 법률에 명시하자고 주장한다. 헌법 14조가 거주, 이전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지만 이동권이 명시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다. 또한 법률에 의해 보장될 때 적극적인 역할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동권의 보장이 약속에 그칠 때 이를 강제할 수 있는 근거도 마련될 것이다. 실제로 독일과 캐나다 등의 국가는 이동의 자유를 헌법에 권리로 명시하고 있다. 그렇게 된다면 장애인의 대중교통 이용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수 있을 것이고, 비장애인과 장애인 모두 저상버스를 비롯한 대중교통을 원활히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날을 위해 함께 목소리 내는 것이 시위에 나설 수밖에 없는 사람들과, 불편을 호소하는 사람들의 불편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는 가장 현실적인 방안일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철승,『쌀 재난 국가』, 문학과지성사, 202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