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관계의 재정립이 필요한 건 아닐까요?
우울증 진단을 받은 후 가장 힘들었던 일은 우울하다는 이야기를 마음 놓고 할 사람이 없었다는 겁니다. 가족들에게 이야기했을 때에도 그러니깐 일찍 일어나라, 병원에 가봐야 소용없다, 의지로 이겨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내가 왜 우울한지에 대한 관심이 생략된 채 문제 해결만을 위한 조언을 하는 걸 보고 '가족에게는 더 이상 이야기해봐야 소용없겠구나' 싶어 오랜 시간 관계를 유지했던 친구들에게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반응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더 상처를 받았고 나의 모든 인간관계에 회의를 느껴 더 무력하고 더 우울해졌습니다.
오히려 뜻밖의 관계, 뜻밖의 사람에게서 위로를 얻었습니다. 제 브런치의 글을 보고 연락을 주신 서울 사람책 관계자분들과의 인터뷰와 컨퍼런스를 통해서 위로를 얻었고, 처음 뵙는 독서클럽 및 강연장에 모인 사람들에게서 안도를 얻었습니다. 제 상황을 알고 연락을 준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자주 만나고 연락하는 사이가 아니었음에도 제 마음을 헤아려주고 위로하기 위해 먼저 손 내밀어준 사람들이 있었던 겁니다. 우울의 늪에서 한 발 앞으로 디딜 수 있는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 고마움은 앞으로도 절대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가족이나 오래된 친구가 무조건 좋은 관계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가족이나 친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맹목적인 믿음이 오히려 저를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관계의 유지를 위해 원하는 걸 파악해 맞춰주는 편을 택했고, 갈등이 생기지 않도록 제 욕구를 숨겼습니다. 관계에 솔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털어놓아야 해소된다는 말을 듣고도 주저했습니다. 우울증 환자가 실제보다 상황을 부정적으로 인식해 '나는 말을 할 친구가 없어'라고 여기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수 차례 시도와 실패를 겪으며 알게 된 것은 오랫동안 우울감을 가지고 있었다면 정말 말할 친구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우울한 모습을 한 번도 보여주지 않고 항상 웃고 좋은 모습만 보여주다가 우울하다는 말을 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심지어 용기 내어 말을 했을 때 전형적이거나 형식적인 답변을 듣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기대는 점점 사라졌습니다. 제 말을 들어줄 거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에게는 미안해서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우울한 이야기를 계속하다 보면 그 사람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리라는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끝없이 반복되는 부정적인 사고와 반추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습니다. 겉으로는 친구도 많아 보이고 관계도 원활해 보임에도 우울하다고 말할 친구가 없다는 말은 일정 부분 사실인 셈입니다.
관계를 재정립하는 중입니다. 저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늘려보려 합니다. 불편한 관계를 억지로 유지하기 위해 연기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나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지 못할 거야', '이 사람들마저 내 주변에서 사라지면 나는 혼자가 되고 말 거야'와 같은 생각은 가능성의 영역으로 치워놓기로 했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을 만나볼 기회가 될 수도 있고, 더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제 안에서 '넌 안 될 거야. 그러다가 혼자가 될 거야.'라는 목소리와 '혼자면 어때. 그 시간을 잘 보내야 더 나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거야'라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싸웁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심리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들고 쉬이 지칩니다.
더 나은 관계를 지향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성장과정에서 갈등과 조율을 통해 자연스럽게 만들어갔을 관계를, 나이를 먹고 다시 원점에서 생각하고 재정립한다는 게 말입니다. 하지만 힘들다는 이유로 이전의 관계를 억지로 유지하면서 살고 싶지도 않습니다. 실패할 수는 있겠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성장 없이 현상(우울한 상황)을 유지하거나 오히려 악화될 수밖에는 없을테니깐요. 그렇게 저는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제가 관계를 만들어온 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편한 사람, 익숙한 사람이 무조건 좋은 게 아니며, 낯선 사람, 불편한 상황이 꼭 나쁜 결과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조금씩 깨우치면서 말이죠.
우울함에도 말할 사람이 없다면 우선 그게 본인의 부정적인 시각이 만들어낸 착각은 아닌가 고민해보세요. 물론 단 한 사람도 주변에 없다는 생각과 지독한 외로움이 사무친다는 걸 압니다. 아무리 반복되어도 거절당하고 비난당하고 오해받는 상황에 무뎌지지 않는다는 사실도요. 그럼에도 본인의 모습을 그대로 내어놓기를 시도해보세요. 일부러 괜찮은 척하거나 즐거운 척할 필요 없습니다. 물론 저는 그 과정에서 많은 상처를 받았지만 제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친구가 제 주변에 있었음에도 손을 내밀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맙게도 먼저 손 내밀어준 사람들 덕분에 혹은 제가 내민 손을 잡아준 친구들 덕분에 새로운 관계를 만들게 되었고요.
그럼에도 말할 사람이 정말 한 명도 없을 수 있습니다. 저도 그랬으니깐요. 그럴 땐 스스로 본인 편이 되어주세요. 저도 제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일기장에 수많은 글을 썼습니다. 그 글을 다시 읽고, 다른 글을 쓰면서 제가 저를 사랑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스스로를 비난하고 하찮게 여기는 사람이 외부의 도움만으로 뿅! 하고 긍정적 사고를 가진 사람으로 탈피할 수도 없다는 사실도요. 그리고 이 글도 쓰고 있습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저는 여전히 하루에도 수십 번 완벽하지 못한 저에게 비난을 가합니다. 그럼에도 이전보다 나아진 나를 느끼며 좋은 방향이 어딜까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편안한 밤과 낮, 자연스러운 관계가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