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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호 May 21. 2021

우울이 간 자리에 불안이 남았다


1.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고속도로가 많이 밀려 버스가 가다 서기를 반복했습니다. 기사님 바로 뒷자리에 앉아 바로 앞의 흰색 트럭이 멀어졌다 가까워지는 걸 바라보고 있으니 답답함이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버스에서 내리지 못할 텐데 속이 더 안 좋아지면 어쩌지?', '고속도로에서 내려달라고 할 수 있나?', '일단 내려달라고 할까?' 하는 고민이 불쑥 올라오면서 발 끝이 저릿저릿해지는 게 느껴졌습니다. 시야도 좁아지고 숨이 가빠왔습니다. '내가 왜 이러지?', '이러다 죽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공포가 밀려왔습니다. 옆자리에 앉은 짝꿍의 얼굴을 슬쩍 봤습니다. 곤히 자고 있더군요. 깨우기 미안해서 혼자 심호흡을 했습니다. 이게 공황이구나 싶더군요. '나는 괜찮다. 잘 도착할 거다. 공황으로 죽는 사람은 없다.'를 반복하면서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하다 보니 조금 나아졌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죠. '돌아가면 정신과 진료를 다시 받아야겠다'라고요.


2. 


우울함이 많이 사라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끔 심장이 빨리 뛰거나, 조급함을 느끼기는 했지만 전보다 분명 정도가 덜 하기에 나아지고 있는 중이라고만 생각했죠. 하지만 우울이 걷힌 자리엔 불안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버스에서 공황을 느낀 건 단순히 버스가 밀려서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예측할 수 없는 변수들이 많아서 고민하고 결정해야 하는 일들이 반복되고,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사람들 사이에서 긴장하게 되기 때문이죠. 돈과 시간에 대한 강박도 저를 힘들게 합니다. 여행에 가서도 효율적인 방법을 찾으려 하고, 최대한 적은 돈으로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죠. 평상 시라면 정보를 찾아보고 고민을 거듭한 후에 결정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여행에서는 그게 불가능하죠. 먹을 거 하나를 골라도 이게 나을까, 저게 나을까 자꾸만 고민합니다. 그리고 함께 간 사람 눈치를 자꾸만 봅니다. 이 사람은 이걸 좋아할 텐데  양보하는 건 아닐까? 근데 이걸 먹으면 예산이 초과되지 않을까? 하면서요. 그 순간 받는 스트레스와 에너지 소비가 너무 크다 보니 자연스레 피곤해지는 거죠. 게다가 폭풍급의 비바람까지 치는 바람에 가던 길을 돌리고 숙소로 돌아오는 상황도 있었고, 숙소 전기에 문제가 있어 약간의 불편함도 겪었고요.


3. 


제가 가지고 있는 핵심 신념 중 하나는 '돈이 없으면 불행하다'는 겁니다. 이 신념은 '무조건 아껴야 한다', '쓸데없는 데 돈 쓰면 안 된다'같은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먹을 거에 돈을 쓰거나 필요 없는 물건을 샀을 때 죄책감까지 느끼게 합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신념 중에 가장 강력하고, 이를 어겼을 때 스스로에게 가하는 자책의 정도도 가장 높습니다. 가지고 있는 돈이 줄어들 때 느끼는 불안도 큽니다. 절대적 빈곤의 수준이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어렸을 때부터 굳게 박힌 신념이라 지독히도 안 바뀝니다. 그냥 '오늘은 돈 좀 썼네~' 정도로 끝나면 될 텐데 


<이런 식으로 소비하다가는 내 인생은 망할 거야>  <돈을 쓰는 것도 못 참는데 내가 뭘 잘하겠어> → <이런 나를 좋아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 <나는 결국 외톨이가 되겠지> → <이런 내 마음을 이해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하는 식으로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고정적이고 안정적인 수입이 없는 상황이라 더 그런 거 같습니다. 


4. 


여행 내내 말을 못 했습니다. 먹을 거 하나 고르면서 돈이 아까웠어 끙끙대는 모습은 스스로도 못나 보이고 찌질 해 보이니깐요. 생각이 머릿속에 고여서 빙빙 돌다가 '나는 여행이랑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다시는 여행에 안 와야지'라고 결정 내려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어 이건 아니지?' 생각이 들더군요. 제가 또 상처 입는 게 싫어서 극단적으로 회피하려는 걸 알아차렸거든요. 그래서 창피함을 무릅쓰고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어떤 방식으로 사고를 하고, 그런 상황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를요. 물론 그 순간에도 '이 이야기를 듣고 기분 나빠하거나, 찌질하다고 연을 끊자고 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5.   


  저는 왜 이렇게까지 돈에 불안함을 느끼게 된 걸까요? 쏟아지는 주식, 부동산, 코인 이야기가 왜 불편한 걸까요. 그리고 그 불안이 일을 시작하지 못하게 하는 악순환을 만들고 있고요. 이 고리를 끊으려면 저는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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