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보고_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광호 Jul 31. 2021

전쟁터에서 태어난 어린이들

전쟁터에서 태어난 어린이들

악동뮤지션의 「전쟁터」 와 김소영의 『어린이라는 세계』(사계절, 2020) 함께 읽기


악동뮤지션의 「전쟁터」는 어린이들이 생존을 위해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곳이다. 어린이들은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세계에서 삶을 시작한다. 국가, 인종, 성별, 부모 그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은 채 태어났음에도 어른들과 동시대를 살아가며 같은 문제를 맞닥드리는 수밖에 없다. 이렇듯 우리의 삶은 우연성에서 출발했다. 앞으로 태어날 어린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타인 혹은 이 세계와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가야 할까?


아이들은 사회의 반영이다

"뼈 더미 위에 조성된" 곳이다. 전쟁의 주체는 아이들이다. 총을 들고 길거리로 나선 것도 아이들이고, 주도적으로 작전을 짜고 전투를 하는 것도 아이들이다.


아이들이 주도적으로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


아이들은 작전을 짜는 중간중간 위를 바라본다. 카메라는 아이들이 바라보는 게 무엇인지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시험지가 쏟아지는 장면을 통해 "피와 총탄이 등장"하지 않는 전쟁이 경쟁이 만연한 사회를 겨냥하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시험지가 쏟아지고 있다


전쟁은 일상화되었다. 도시 외곽이 아닌 주거지에서 전쟁이 벌어진다. 가정 혹은 집이라는 공간은 생존을 위한 투쟁의 공간이 되었다. 안정감을 경험해보지 못한 아이들에게 새로운 시도와 실패는 낙오로 인식된다. 단 한 번의 실수가 죽음(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사회적인 죽음을 의미한다 하더라도)으로 귀결되는 사회에서는 항상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는 긴장감 속에서 살아야 한다. 여기는 전쟁터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경쟁은 일상이 되었다. 어린이라고 해도 사회와 분리된 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전쟁터의 배경은 도심 한가운데이다


태어나자마자 전쟁에 임해야 하는 어린이는 고뇌할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아이가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아이도 있다. 주인공으로 보이는 소년은 총을 든 채 집 안에서 밖을 바라보거나, 밖에 있다가도 집 내부로 들어오길 반복한다. 안정과 평화를 바라는 욕구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외부의 적이 침입하는 상황에 다른 선택지는 없다. 적으로부터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 공동체를 결성한다.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팀을 맺는다


소년은 결심한 듯 화약 연기를 뚫고 앞으로 나선다. 총을 겨눈다. 하지만 그 총은 적군에게만 향하지 않는다. 아군들마저 하나씩 제거한다.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결국 내가 아닌 모든 것은 경쟁의 대상이기 때문에 연대는 일시적으로만 기능한다. 제거해야 할 적이 사라졌거나, 내가 그들을 모두 제압할 수 있을 때에는 언제라도 깨질 수 있는 것이 연대다.


공동체의 다른 존재들을 처리한 뒤 혼자 살아남는다


코로나가 끝나도 전쟁은 계속된다

른으로 추정되는 화자는 "답답해도 조금만 참"으라며 어린이들에게 말을 건다. 「전쟁터」의 영어 표기가 'Battleground'가 아닌 'Hey kid, Close your eyes'라는 것을 통해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어른은 "마스크를 아무도 쓰지 않았"던 시기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코로나 이전을 낙원으로 그리지는 않는다. 코로나 이전에도 우리는 "돈보다 사랑이 필요한 걸" 잊은 채 "헐레벌떡"살아왔기 때문이다. 코로나는 기존의 문제를 가속화하고 증폭시켰을 뿐이다. 그러므로 코로나가 끝나도 문제는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이명이 끝나도 비명이 들릴" 것이라는 예언이 가능해진다. '코로나만 끝나면'이라는 우리의 마법 같은 주문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악뮤는 '몇십 년 후쯤이 되어야 우리는 전설이 될까'라고 묻는다. 전설은 그게 실제 있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믿지 않을 때, 허구로 인식될 때 전설로써의 기능한다. 하지만 전쟁터와 다름없는 무한 경쟁의 사회는 여전히 '현실'이다.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시험은 신념이 되었다. 경쟁에서 승리하는 자만이 정당성을 얻고 이득을 취할 수 있다. 각자도생의 사회에서는 모든 걸 숫자로 표현한다. 키는 몇, 연봉은 얼마, 집은 몇 평, 연애 경험은 몇 회. 수치화 가능한 것만이 나를 증명할 수 있다. 이런 사회에서 어린이들이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현실을 비난할 수 없다.


아이들이 등장하는 또 하나의 텍스트로 봉준호의 「설국열차」를 참고해보자. 열차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Train Baby로 불린다. 열차가 세상의 전부다. 아이들은 열차에 나가면 죽는다고 생각한다. 열차에 타고 있는 걸 월포드를 축복이라고 여긴다. 선생님 또한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다. 학교에 다니지 않았더라도 그런 사회의 분위기는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남궁민수의 딸인 요나도 바깥세상을 상상하지 못한다. 그러니깐 지금 어린이들에게 경쟁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경쟁에 참여하지 않으면? 자본을 적극적으로 축적하고 물질을 소비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승리해야만 살 수 있다. 경쟁에서 도태되면 죽는다. 명시적으로 가르치지 않아도 약자를 혐오하고, 차별하고, 공공의 영역에서 배제시키는 시도들을 보며 아이들은 체득한다. '아, 이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경쟁에서 승리하는 법 밖에는 없다'라고 말이다. 더 나아가 믿을 건 스스로의 능력뿐이라며 자신을 갈고닦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다. 능력주의는 신념이 되었고, 그러한 사회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수호한다. 관객의 시선으로 설국열차 내부를 바라볼 때는 광기를 포착할 수 있겠지만 세계의 내부를 살아가는 사람이 그것을 객관화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똑같은 어른이 될 것인가?

세상이 변화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그럼에도 「설국열차」의 꼬리칸 사람들은 엔진칸으로 향한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의 희생이 있었고 몇 명만이 살아남아 엔진칸에 도착한다. 윌포드는 엔진칸을 찾아온 커티스에게 "누구나 애초부터 정해진 자리가 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커티스에게 엔진칸을 물려받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꼬리칸에서 엔진칸을 향하며 기차 내의 시스템을 모두 경험한 커티스는 고민한다. '열차를 지키기 위해 불가피한 죽음이나 희생이 필요하다', '정해진 위치에서 각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말이 설득력 있게 들리기도 한다. 어쩌면 엔진칸을 물려받는 게 합리적인 선택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변화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말이다. 열차 밖의 세계를 상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바꾸지 말자는 말이나 마찬가지고, 아무것도 바뀌는 게 없다는 말과도 같다. 


그렇다. 절망은 쉽다. 희망은 어렵다. 소중한 것들을 잃거나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감수해야 할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김소영은 『어린이라는 세계』에서 우리가 절망보다는 희망을 향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언제나 절망이 더 쉽다. 절망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얻을 수 있고, 무엇을 맡겨도 기꺼이 받아 준다. 희망은 그 반대다. 갖기로 마음먹는 순간부터 요구하는 것이 많다. 바라는 게 있으면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외면하면 안 된다고, 심지어 절망할 각오도 해야 한다고 우리를 혼낸다. 희망은 늘 절망보다 가차 없다. 그래서 우리를 걷게 한다.

 김소영,『어린이라는 세계』, 사계절, 2020, pp.219~220


물론 그렇지 못한 현실이 우리를 무력감과 패배감 속으로 던져놓는다. 비난하고 비관하고 절망하기 쉽다. 하지만 그럴수록 이 사회는 더 견고해지고, 아이들은 그런 세상에 계속해서 태어난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 세상을 반영한다. 엔진칸 아래에서 발견된 아이 또한 자신의 고유성을 상실한 채 엔진의 부품이 되어버린다. 이름을 불러도 응답하지 않고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데에만 열중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런 세상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엔진의 부품이 되어버린 어린이



실수와 실패에 관대해지자

우리는 모두 수많은 실수를 거치며 어른이 되었다. 커티스가 엔진칸에 도착하기 전에도 수많은 시도들이 있었다. 실패한 혁명은 기억 속에만 남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시도가 쌓여 커티스가 엔진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변화는 실패 위에서 실현된다. 우리가 세상을 비난했던 건 사실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그러니 나를 돌보고 타인의 실수와 실패에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


이런 세상을 만들었냐며 윗세대를 욕하지만 내가 곧 그 윗세대가 된다. 대물림해야 할 필요는 없다. 여기서 끊어내지 못한다면 끊어내려는 시도를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언어로, 법으로 명시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는 사회를 통해 배운다. 우리가 중요시 여기는 가치가 돈과 능력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삶을 통해 꾸려내야 한다. 그런 어른들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다른 가치들을 위해 시도하고 또 시도할 것이다. 어린이는 그런 존재다. 열차가 폭발하는 최후의 순간 남궁민수와 커티스가 두 명의 어린이들을 감싸안는 것도 그러한 가능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열차가 폭발하는 순간 아이들을 향해 간다
두 아이를 껴안는다


우리 모두는 실패와 시도를 반복하며 성장한다. 어른이 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미성숙한 부분들이 있다. 그런 모습을 들키기 싫어 방어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더 나아지려 애를 쓰기도 한다. 그런데 아이들은 오죽할까. 실패하고 실수하면서 지적을 받으면서 성장해야 한다. 그러므로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이 세계가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곳이라는 믿음을 줘야 한다. '이 험한 세상에 어떻게 살아가려고 하냐'는 채찍질은 이 사회가 전쟁터라는 사실만을 끊임없이 인식시킨다. 그렇게 되면 아이는 생존만을 위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숨이 죄는 줄도 모르고 헐레벌떡 산 위를 오르는" 사람 말이다. 


실패하더라도 나를 받아줄 사람, 사회가 있다는 믿음이 우리를 더 나은 곳으로 향할 수 있게 한다. 한 번에 완벽해지는 건 없다. 뒤로 한 발 가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면서 나아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에게 모래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는 또 걱정을 버리지 못하고 물었다.
“떨어져서 다치면 어떡해?”
그러자 하준이는 웃는 얼굴로 나를 안심시켰다.
“밑에 모래 있으면 떨어져도 안 아파요.”
 그렇지, 모래가 있었다. 놀이터의 모래 때문에 뛰기 어렵고, 모래가 자꾸만 신발 속에 들어가 불편하다고만 생각했는데. 하준이는 바로 그런 모래를 믿고, 떨어져도 다칠 걱정 없이 아찔한 정글짐을 올랐던 것이다. 나는 마치 격언인 것처럼, 하준이의 말을 그대로 외웠다. “밑에 모래 있으면 떨어져도 안 아파요.”이 말을 떠올릴 때마다 어른의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p.63





* 출처


1. 유튜브 채널 'AKMU', <AKMU - '전쟁터 (Hey kid, Close your eyes) (with Lee Sun Hee)' OFFICIAL VIDEO> URL : https://www.youtube.com/watch?v=gMXXVS6Hil4, 최종 검색일 : 2021.07.31. (악동뮤지션 「전쟁터」의 가사 상세 설명은 모두 AKMU 공식 유튜브 채널을 참고함.)


2. 봉준호, 『설국열차』, 2013 (네이버 시리즈 온에서 구매 후 화면 캡쳐)


3. 김소영, 『어린이라는 세계』, 사계절, 2020

 

매거진의 이전글 어쩌면 나는, 신이 되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