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무요원으로 배치를 받기 전 4주간 논산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받았다. 시간이 제법 흘렀음에도 유독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들이 있다.
1. 아앙, 싫어!
2~3주 차쯤 지나고 훈련소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했을 때였다. 훈련을 하고 돌아오면 밥을 먹을 때까지 자유시간이나 마찬가지인 개인 점호시간이 주어졌다. 짐을 정리하거나 편지를 쓰거나 책을 읽는 등 각자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관물대를 정리하려고 했던가? 아무튼 자리에서 일어나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그때 나보다 나이가 많았던 훈련병이 아껴둔 건빵이 있다며 같이 나눠먹자며, 관물대 위에 있는 가방을 꺼내 달라고 했다. 나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아잉~ 싫어!'하고 앙탈 아닌 앙탈을 부렸다. 그런 적이 전혀 없었으니 나도, 다른 사람들도 당황했다. 그 훈련병은 나에게 '왜 그러냐?'라고 했다. 나는 그러고서 가방을 가져다주었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나는 그 훈련병이 나를 괴롭히거나 힘들게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보컬 연습생이었다던 그 훈련병은 붙임성도 좋고, 목소리도 크고, 자기주장도 잘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중대장 훈련병을 자원하기도 했다. 다른 분대 사람들과도 인사를 하고 안면을 트고 지냈다. 그게 다였다. 나한테 딱히 잘못한 것도 없고 위협을 가한 적이 없는데도 나는 그가 왠지 불편했다. 그래서 대화할 때에도 지나치게 친한 척을 하거나, 반대로 형식적인 말만을 주고받기도 했다. 그와 나는 동등한 관계가 아니고, 그는 나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가방을 달라는 부탁을 '명령'이라고 받아들였다. '지금 저 사람의 명령을 받아들이면 다른 사람들도 나를 무시하고 괴롭히기 시작할 거야'라는 나의 무의식이 작동했다. 하지만 건빵을 나눠먹자며 가방을 좀 전해 달라는 부탁을 거절하는 것도 이상하다는 걸 이성은 알고 있었다.
'만만하게 보이면 사람들이 나를 괴롭히고 무시할 거다'라는 생각은 어린 시절부터 가지고 있었다. 나는 목소리가 크고, 덩치가 크고, 힘을 쓰는 사람들을 무서워했다. 아빠가 어렸을 때부터 술을 마시고 오면 폭력을 썼는데 비슷한 행동을 보이는 사람만 봐도 겁이 났다. 저 사람이 나를 때리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에 공포를 느꼈다. 그리고 그 감정은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나는 항상 겁에 질려 있었다. 하지만 내가 겁에 질려있다는 걸 들키면 정말 나를 괴롭히고 때리고 이용할 거라는 생각에 내 감정을 숨기고 아닌 척했다. 작은 강아지가 더 큰 목소리로 짖는 것처럼 쾌활한 척, 당당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여유로운 척했다. 그렇게 쌓인 감정과 이성이 불일치는 꾹꾹 눌러져 있다가 건빵을 먹자는 순간에 '펑!'하고 터져 고장이 난 거다.
2. 네가 해야 하는 일 아니야?
내무반 안에 각자의 총기를 보관하는 총기함이 있다. 평소에는 잠가두고 훈련 시만 분대별로 지정된 담당자가 열쇠를 가지고 있다가 열어주는 게 원칙이다. 그런데 하루는 담당이 아닌 훈련병이 총기를 받아 집어넣고 있었다. 훈련을 가기 전에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이나 먼저 움직인 사람이 자기 총기를 찾으면서 다른 훈련병들의 총기도 나눠주기도 했지만 번호를 확인하고 집어넣는 건 다른 일이었다. 나는 당연히 담당자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서 '저건 네가 해야 할 일이 아니냐'라고 물었다. 자기 자리에서 팔굽혀펴기를 하던 담당 훈련병이 얼버무려서 나는 다시 '네가 담당이 아니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 훈련병이 갑자기 총기함을 주먹으로 쾅! 내려치더니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하필 총기함이 철제로 되어있어서 폭발 소리라도 난듯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고개도 안 돌린 채 신문에 있던 십자말 풀이를 계속 풀었고, 나이가 많은 훈련병들이 깜짝 놀라 무슨 일이냐며 상황을 파악했다. 조금 이상하게도 총기 담당자가 자신의 일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고, 그 훈련병이 주먹으로 내려친 건 나이 많은 형들 앞에서 버릇이 없는 행동을 한 거라는 결론이 나왔다. 총기함 담당 훈련병은 자기가 화가 많이 났어도 형들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인 건 잘못이었다며 나이가 많은 훈련병들에게 사과를 했다. 그러더니 나보고 할 말이 있다고 밖으로 나와보라고 했다. 요약하면 훈련소 내에서 업무적으로 필요한 이야기는 하겠지만 너에게 화가 많이 났으니 개인적으로 아는 척은 하지 말자는 거였다. 나는 아쉬울 게 없었으니 알았다고 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사건의 어처구니없음을 뒤로하고 생각해보면 나는 인간관계에서도 강박적인 성향을 가지고 살았다. '~해야 한다'는 나만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신경이 곤두섰다. 총기 담당자가 해야 할 일을 다른 사람에게 미룬 채 모른 척하고 있었다는 건 사실이겠지만, 총기를 잘못 다뤄서 사고가 나는 위험성보다는 내가 생각하는 역할과 기준을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 더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런 성격이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는 나와 상대에게 악영향을 주는 경우가 많다. '해야 한다'는 당위는 사람들의 개별적인 성향이나 특질은 물론 현실의 다양한 사건들을 고려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나는 내 기준에 맞지 않으면 불편해하다가 가열차게 연을 끊어버린다. 상대는 내가 갑자기 돌변해버리니 그 나름 상처다. 내가 불편한 일이 있을 때 내 생각을 이야기해야 오해가 있다면 풀고, 누군가의 잘못이라면 사과를 하거나 보완을 할 텐데 그러지 못한다. 강박에 회피까지 더해져 만들어진 환장의 콜라보다. 혼자 씩씩거리다가 상대가 불편해하면서 나를 밀어내면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이래서 내 에너지를 쓰면서 힘들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니까?' 하면서 내 논리를 강화시킨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싸우는 모습을 보며 자라온 내 안에는 사람 간에 갈등이 생겼을 때 맞춰나갈 수 있다는 믿음이 없다.
내 인생에서 특정 사건이 기억나는 건 이유가 있다. 그리고 나를 불편하게 하는 기억은 내 약점이나 상처를 건들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