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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호 Sep 15. 2021

청년실격

  월요일 오후 한적한 역에 내려 길을 따라 걷는다. 햇살은 따사롭고 왕복 8차선 도로에는 차들이 어디론가 쌩쌩 달려가고 있다. 큰길을 지나 건물 사이로 들어간다. 사람들이 일터로, 학교로 떠난 골목에는 고요와 평온이 감돈다. 고양이 한 마리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어쩐지 나는 그 골목의 분위기가 어색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나는 되도록 늦지 않게, 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될 시간에 도착할 수 있도록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렇게 종종걸음으로 주택가를 지나 조그마한 건물 하나를 마주한다. 입구에는 ‘건강가정지원센터’라는 작은 글씨가 쓰여있다.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심장이 또 두근거리기 시작해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 한숨을 크게 한번 내쉰다.


  “저번 상담을 하고 느낀 점이나 변한 부분이 있었어요?”


  상담은 매번 같은 질문으로 시작되지만 입을 떼는 게 쉽지 않다. 나도 내 마음을 모르는데. 자꾸만 변화를 찾으려 하니 무척이나 고단하다. 말문이 막힐 때면 ‘상담을 받는다고 취직이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불면증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요. 여전히 사람들을 만나야 할 때면 심장이 쿵쿵거리는걸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요. 왜 하필 이런 시기에 태어나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 거죠? 선생님, 상담을 받으면 좋아진다고 약속해주시면 안 돼요? 제발요. 엄지손가락 내밀고 복사, 코팅도 해주세요. 누군가 나아질 거라는 확신을 주었으면 좋겠어요. 거짓말이라도 좋으니까요. 그러면 차라리 원망이라도 할 수 있잖아요.’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이미 했던 이야기다. 오늘은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제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갑자기 끊어내는 패턴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예를 들면 중학생인 저와 고등학생인 저, 혹은 일을 할 때와 집에 있을 때 제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거든요. 누군가랑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게 어색하고 힘들어요. 그래서 친구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 같아요. 항상 외로웠어요”


  “그럼 왜 그랬을까요? 그 마음을 들여다봐야 해요.” 


  마음을 들여다보라고? 생각과 마음을 어떻게 구분한다는 거지? 내가 슬프다고 생각하면 슬픈 거 아닌가? 상담을 받고 나면 잊고 있었던 기억이라던가 과거의 잘못이 떠올라 더 힘들 때도 있다. 지금 공부를 하고 자격증을 따서 취직해야 하는데. 나는 왜 이러고 있지? 자괴감이 든다. 2030 청년들이 영혼을 끌어모아 집을 사고, 공무원이나 공기업 같은 안정적인 직장에만 가려고 해서 문제라는데. 나는 그 문제 근처에 갈 수도 없다는 게 문제다. 사람들이 말하는 청년은 대체 누구일까. 나는 이제 일반적인 청년이 될 수 없는 걸까. 실격된 삶일까. 머리가 복잡하다. 그럴 때는 명상을 한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고 올라오는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마음이 평온해지면 다시 일한다. 하지만 그때뿐이다. 혼란한 마음은 기본값에 가깝다.


  “아무도 제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혼자가 되는 게 무서웠어요. 집은 저에게 안정감을 주는 곳이 아니었거든요.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곳이었어요. 저는 항상 불안해했던 것 같아요. 외롭고 무서웠어요. 그래서 제 마음에 안 들어도 맞춰주려고 했던 거 같아요. 학교에서도 혼자가 되는 건 싫었거든요. 그러다 제가 맞춰주기만 하는 관계가 힘들어지면 관계를 끊어내는 패턴을 반복했던 거 같아요.”


  맞다. 나는 나를 잃고 살았다. 그 사실을 곧 서른이 되는 골목에서야 깨달았다. 내 감정을 무시한 채 다른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썼다.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 되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다. 매 순간 전력투구였다. 지쳐 쓰러져서도 내 마음을 누구보다 먼저 갉고 닦으려고 했다. ‘우울’이라는 상황을 완벽하게 극복하려 애썼다. 그리곤 경쟁이라는 시장에 나를 다시 내던졌다. ‘저는 이렇게 적극적으로 마음을 수련하고 가꿔 우울증을 극복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불안과 걱정을 연료로 달렸다. 그렇게라도 삶을 역전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경쟁의 논리 내에서 살아남으려는 투쟁 중 하나였다. 나는 내 마음을 이용하고 있었다. 아무리 마음을 들여다 봐야 힘든 삶이 반복되는 이유였다.


  “아빠가 술을 안 드시고 오시길 항상 빌었어요. 하지만 하느님은 한 번도 제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았어요. 아빠가 엄마의 마음을 알아줬으면 했어요. 우리 집이 가난하지 않아서 아빠가 더 이상 고생하시지 않게 해드리고 싶었어요. 그리고 누군가는 그런 저를 이해해줬으면 했어요. 정말 많이 힘들었는데 누구 하나 구해준 사람이 없었어요. 이제는 기대도 남아있지 않아요.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다 제 책임 같아요. 저는 아무것도 못 할 거 같아요.”


  때로는 웃고, 때로는 체념하고 어느 날은 울면서 이야기를 꺼낸다. 뭔가 변한 것 같다가도 되돌아가기를 반복한다. 상담으로 바꿀 수 있는 건 오직 내 마음뿐이라는데, 그마저도 잘 안 된다. 무척이나 비효율적이고 무의미한 작업이다. 지금 사회는 공정한 경쟁과 능력을 통해 인재를 선발한다는데. 청년 세대가 공정을 부르짖는다는데. 그렇다면 나는 그곳에 없다. 나는 효율을 낼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다. 청년을 부르는 소리로 귀가 아프지만 나를 부르는 소리는 없다. 그 소리가 자신의 존재와 상처마저도 갈고 닦고 변형시켜 경쟁 속으로 들어오라 외치는 소리라면 내겐 아무 소용 없다. 그곳에 내 자리는 없다.  


* '청년 실격'이라는 제목은 다자이 오사무의 책 『인간 실격』에서 따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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