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눈을 감고 속수무책으로 누워있었다. 눈을 뜬다 해도 헝겊으로 눈을 덮어 놓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드르륵. 의자를 끄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누워있는 내게로 다가왔음을 느꼈다. 그가 누구인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지만 중저음의 목소리와 체취로 중년의 남성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익숙하게 내 입 속을 하나하나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만지고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낯선 남자가 입 속을 들여다보는 상황은 불편하고 어색했다. 내 입 속을 살피던 그는 숫자를 몇 개 불렀다.
갑자기 충치 치료가 시작됐다. 검진만 받으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스케일링도 받고 충치도 치료해야 했다. 왼쪽에서는 치위생사가 석션을 들고 침샘을 꾹꾹 누르기 시작했고 의사 선생님께서는 괴성이 들리는 무언가로 어금니를 찌르기 시작했다. 눈은 안 보이는데 뾰족하고, 시끄럽고, 뜨거운 무언가로 이를 갈아내기 시작했다. 이러다 구멍이라도 나면 어떻게 하나 싶었다. 이에 있는 신경을 건드리면 그렇게 아프다는데 이러다 신경을 찔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지?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땀이 삐질 나고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느낌이 왔다. 공황의 전조 증상이었다. 심장이 뛰는 걸 느끼니 심장이 더 빨리 뛰기 시작했다. 내리막길 눈덩이 굴러가듯이 점점 커졌다. 막을 방법이 없었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고 몸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눈은 가려져 있고 말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더 당혹스러웠다. 의사 선생님이 내가 눈을 감고 있을 때 갑자기 뾰족한 걸로 내 눈을 찌르면 어떻게 하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믿는 거지? 이렇게 무기력하고 무방비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이 나를 해하지 않을 거라는 신뢰가 가능한 이유가 뭐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한 번 침투한 생각은 깊고 넓게 확장될 뿐 사라지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이 무언가를 이에 고루 펴 바르고 이를 딱딱 다 물어보라고 하고, 이 사이에 치실을 넣고, 충치가 있는 부분을 손으로 꾹꾹 눌렀다. 선생님의 손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어른들에게 나는 냄새도 났다. 안도감이 느껴졌다. 모르는 사람이 나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열심히 노력할 수 있구나. 우리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고 하지만 타인을 믿고 의지하면서 살아가고 있구나. 다른 사람의 건강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공황 증상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심해지지도 않았다. 긴장은 됐지만 그럭저럭 견딜만했다.
나는 그 정도로 타인을 경계하면서 살았다. 사람들이 나를 비난하거나, 공격하거나, 이상하게 볼 거라는 생각을 했다. 낯선 환경, 새로운 일들이 어색하고 무서워 회피했다. 치과에 가본 기억이 초등학교 때가 마지막이니 적게 잡아도 15년 동안 치과에 안 갔다. 혹시 치과에 갔는데 이상이 있거나 교정을 해야 한다고 할까 봐 무서웠다. 병원에 갔다가 더 큰 문제가 있을까 봐 검진하는 거 자체를 피하면서 살아왔다. 회피할수록 공포는 커졌고 불안이 자라 공황이 되었다.
하지만 안도를 느낄 수 있었던 것도 사람 덕분이었다. 나를 위한 따뜻한 손길에 마음이 울컥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의사 선생님의 손길에 위로를 받을 정도로 나는 외롭고 무서움에 떨고 있었던 것이다. 30년 가까운 시간을 내 안으에 숨어 덜덜 떨었다. 앞으로도 새롭게 혼자 해보는 일 투성이일 텐데. 그때마다 공황에 시달릴 순 없는데. 방법은 하나다. 무섭고 어색해도 회피하지 않는 것. 내가 해보지 않았고, 도망쳤고, 회피해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부딪히는 거다. 공황이 또 올지도 모르지만 별 거 아니라는 걸 알 때까지 반복하는 수밖에 없다.
어른이가 15년 만에 치과 다녀오느라 수고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