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하(인터뷰이의 요청에 의해 실명을 밝힙니다)에게 나의 회피성 성격을 해결하기 위한 조언을 부탁했다. 준하는 "조언할 필요성을 못 느끼겠"다면서"회피해도 되고, 우울해도 돼"라고 했다. 이대로도 괜찮다는 거였다. 아차 싶었다. 맞아. 이대로도 괜찮다고 했지? 내 감정이 옳다고 했잖아. 지겹도록 들은 말이고, 스스로 반복해서 되뇌었던 말이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머리로 안다고 그 문장이 내 것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내가 우울증에 걸렸다는 사실을 인정한 뒤,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브런치 매거진 이름도 <나는 이 우울을 극복해야 한다>로 지었었다. 우울증은 문제 상황이었고, 어떻게든 해결해야만 하는 과제 같은 거였다. 그 과정에서 내가 무엇이든 완벽하게 해내야 하고,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아야만 행복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바로 그게 내 삶을 힘들게 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래 놓고 우울증을 완벽하게 극복하려 하고 있다. 병을 치료하는 데에 환자의 의지가 제일 중요하다지만 '우울증을 극복하고 말겠어!'라는 나의 의지는 정도를 지나치기도 한다. 분명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되려 숨이 막히는 순간들에 나도 그걸 느낀다. 노력할수록 더 힘들어지고, 그러다 포기하게 되는 악순환이다. 해야만 한다는 당위와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이 우울의 원인이라는 걸 깨달아 놓고도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뭐든 가장 효율적으로, 완벽하게 해결하려는 삶의 관성이 쉽사리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음료와 디저트를 가운데에 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2.
다면의 '마의 삼각형 이론'에 따르면 우울증은
신념 - 자극 - 결과(작동)이라는 세 단계를 거친다.
이때 신념은 <~해야 한다>의 형태를 가진다.
그리고 결과는 항상 <극단적>이다.
예를 들어 '나는 완벽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 '한 문제를 틀렸다'는 자극을 받으면 '나는 쓰레기야. 죽어야 해'라는 왜곡된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여기에 '우울증을 극복해야 한다'는 신념을 넣어도 마찬가지다. '우울증을 극복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 '우울하다'는 감정을 느끼게 되면 '방금 우울했어? 정신의 문제도 이겨내지 못하는 걸 보니 나는 아무 쓸모가 없어. 내 존재는 벌레만도 못해'라는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다. 약을 먹고, 전문가들이 시키는 걸 다 해봐도 변화가 없는 건 우울증을 해결하려는 시도가 '마의 삼각형'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출처 : 내 머리
준하는 내가 어떤 점을 고쳤으면 좋겠냐고 묻자 "사람이 우울한 건 나쁜 게 아니"라면서 우울한 게 "장점도 되고 단점도 될 수 있을 거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그 감정이나 생각을 잘 살릴 수 있는 사람"이니 그 감정을 "무조건 버려야 한다고 생각 안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준하의 말은 극복을 당위로 여기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렇다. '나아질 수 있다'는 것과 '나아져야 한다'는 건 분명 달랐다. 전자는 가능성 혹은 선택의 영역이지만 후자는 당위이자 완벽이었다. 나는 다들 이렇게 생각하고 사는 줄 알았는데. 준하는 너무나 쉽게 마의 삼각형 밖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렇다고 고치지 말고 현 상태에 머물라는 것은 아닐 터. 나는 지금 고치고 싶다면 고치되, 고쳐야만 한다고 여기지 않아야 하는 복잡한 상태에 놓여 있다. 도대체 그래서 그걸 어떻게 하는 건데. 누가 좀 알려줬으면 좋겠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으려 하면 코끼리를 떠올릴 수밖에 없잖아. 고치되 고치려 하지 말라니.
3.
불안과 걱정이 사실 나의 생각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마음의 평화가 잠시 찾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 평온은 아주 작은 자극에도 깨지고 만다. 어서 뭐라도 해야지 이렇게 살면 망한다고 내 안의 목소리가 요동친다. 그 목소리를 따르면 다시 우울해지고, 그렇다고 무시하자니 불안해진다. 이처럼 부정적인 신념은 형상기억합금처럼 일정 수준 이상의 자극에 의해 원위치로 돌아가길 반복한다.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려 마음을 먹고, 좋은 글을 읽고 영상을 보아도 그때뿐인 건 이런 이유다. 어쩔 수 없다. 그럴 때마다 다시 돌려놓기를 반복해야 한다. 지나온 나의 삶과의 싸움이다. 어제와 다른 삶을 살고 싶다면, 어제의 나와 이별해야 한다.
말이 쉽지.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면 사람들이 무섭다며 핸드폰을 꺼버리고, 술을 마시고, 현실에서 도피하길 반복할 거 같은 두려움이 몰려온다. 근데 준하는 내가 먼저 연락을 안 하는 게 불편한 적 없냐는 말에 "나도 비슷"하다면서 "볼 때 되면 보겠지. 내가 강요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말했다. 내가 연락도 안 하고, 전화도 안 받고, 갈등 상황이 무서워 회피해도 그러려니 했다. 준하는 나와 "결이 맞다"고 했다. 나랑 노는 게 재밌다고 했다. 있는 그대로도 괜찮다고 했다. 애쓰지 않아도 이어지는 관계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