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는 잔을 채우다 말고 내게 “대학 졸업하면 뭘 할 거냐”라고 물었다. 나는 A가 채워준 잔을 비운 뒤 음악을 배우러 서울재즈아카데미에 가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무심한 척 쪼그리고 앉아 있던 C가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하는 애들이 꼭 안 가더라"
심기가 뒤틀렸다. 급히 잔을 채우고 다시 비웠다. C의 지나가는 말 한마디에 눈살을 찌푸린 내게 변명거리가 필요했다. 나는 그런 말쯤은 대수롭게 넘어가는, 그리고 삶으로 자신의 말을 입증해 보이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천만 원에 달하는 등록금도, 음악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C의 말이 절묘하게 그 공백을 가르고 들어오자 ‘두고 봐라. 내가 꼭 가서 네 말이 틀렸다는 걸 입증해 보이겠다'는 마음이 불타올랐다. 졸업 후 나는 정말 재즈아카데미에 갔고, 1년 과정을 수료했다. 하지만 남은 건 졸업장과 공허함 뿐이었다.
내 삶은 그런 식이었다. 누군가가 나를 자극하면, 그 사람이 틀렸다는 걸 입증하려 애썼다. 열정인 줄 알았던 에너지는 분노와 열등감의 다른 이름이었다. 불일치하는 감정을 안고 달리며 나는 소진되었다. 그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그만둘 수 없었다. 열정과 자기 확신을 가지고 묵묵히 걸어가는 이들에게 밀려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분노라는 에너지가 다 타서 사라질 때까지 달렸다. 엔진이 과열돼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돼서야 간신히 멈출 수 있었다.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완벽한 삶을 살고 싶었다. 그래서 뒤돌아보지 않았다. 나를 채우는 삶이 아닌, 타인과 세계를 부정하는 삶을 꾸려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뒤돌아 볼 용기가 없어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거라고 나를 속여왔다. 분노의 힘으로 바람에 맞섰다. 바람이 반대로 부는 날에도 돛을 내리지 않았다. 온몸에 힘을 꽉 주고 이유 없는 분노를 향해 노를 저었다. 어쩐지 삶이 힘들다 싶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