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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호 Jan 25. 2022

무력감을 느끼면 잠이 오는 이유

우울증과 건선을 함께 겪는다는 것

- 학습된 무력감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착각을 일으켜

- '잠'은 좌절을 피하려는 일종의 방어기제이지만 시도 자체를 못하게 만들어


하기 싫거나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을 직면하면 잠이 온다. 잠을 충분히 잔 날에도 무력감을 마주하면 주체 불가능한 잠이 몰려온다. 구체적인 생각이 아닌 막연한 감정으로 느껴진다. 머리는 안개가 낀 것처럼 답답하고 몸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 생각을 뜯어보면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무능력하다', '실패하고 싶지 않다', '나의 못난 모습을 직면하고 싶지 않다' 등이 존재한다. 


무력감을 느끼면 잠이 오는 것은 이전에 겪었던 실패가 누적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복된 실패와 좌절이 주는 감정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실패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벗어나려 하는 것이다. 나의 몸과 마음은 시도와 도전보다 회피를 택한다. 자동적으로 그 상황을 피하기 위해 감정을 일으킨다. 무력감이 다가오면 시동을 끈다. 좌절감과 상실감을 다시 느끼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1. 

나의 경우에는 아버지의 주사가 이유 중 하나로 추정된다. 아버지의 음주는 무기력을 학습하게 했다. 술을 마시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는 대게 이뤄지지 않았다. 유년시절부터 성인까지 아버지의 음주를 막아보려 애썼지만 항상 실패했다. 가장 가까운 사람 하나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생각이 나를 무력감에 빠지게 했다. 나라는 사람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사람으로 느껴졌다.


2. 

[1]은 교우 관계로도 이어졌다. 큰 목소리를 내거나, 나에게 물리적인 위험을 가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앞에서는 목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티를 내는 건 싫어서 오히려 더 많이 말을 하고 재미있는 사람인 척했다. 속으로는 벌벌 떨면서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거절을 못 해서 같은 반 학생의 방학숙제를 대신해주거나 물건을 비싼 가격에 사주기도 했다. 별로 어울리고 싶지 않은 학생과 몇 년을 같이 다니기도 했다. 교우 관계도, 가정도 모두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한 순간도 마음 놓고 쉴 수 없었다. 어느 것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뿌리 깊게 새겨졌다.


3. 

중학생 때 건선이 생겼다. 현대 의학으로는 정확한 원인을 규명할 수 없어 치료법 또한 존재하지 않는 난치병이다. 10년을 넘게 병원을 다니고 병원비를 지출하면서도 나아질 거라는 희망은 없었다. 오히려 더 악화되기만 했다. 목욕탕, 사우나 등은 가보지도 못했고 반팔, 반바지를 입지도 못했다. 내 인생은 더 나아질 수 없고 나빠지기만 할 것이라는 생각은 신념이 되었다. 내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런 단단한 가치관을 만들었다.


4. 

1~2년 전부터 생물학적 제제 코센틱스를 맞고 있다. 눈에 보이는 병변이 없을 정도로 호전이 되었다. 우울증도 적극적으로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지는 알 수 없다. 건선이 생겨서 우울해진 것인지, 우울해서 건선이 생긴 것인지는 나도, 의사도 모른다. 하지만 건선 환자의 우울증 발병 확률이 일반인에 비해 월등히 높다는 사실은 통계로도 증명되어 있다. 변하지 않고 호전되지 않음에도 치료를 계속하다 보면 무력감에 휩싸인다. 삶의 긍정적인 변화는 없는데 시간과 비용만 사라지는 상황은 결코 유쾌하지 않다.


5.

무력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아주 작은 것부터 실천해야 한다. 나는 오늘 곡을 쓰겠다고 앉았다가 무력감에 휩싸여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누워버렸다. 곡을 한 번에 다 써버리려고 하니까 부담이 되어서 더 안 써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냥 평소에 사놓고 보지 않았던 교재를 훑었다. 그러다가 모티브 하나를 변주하는 과제를 하나 했고, 그렇게 4마디의 곡을 하나 만들었다. 한 곡을 쓰는 건 불가능이라고 느꼈지만 4마디의 멜로디는 하나 만들었다. 


마음에 안 들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지금 무력감에 맞서 싸울 힘이 없다. 좌절의 상처가 몸과 마음에 아직 남아있다. 정면돌파 하기에 나는 아직 힘이 약하다. 무기력이라는 놈을 조금씩 깎아내는 수밖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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