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언제까지 시험을 거부하고 살 수 있을까요?"
능력주의를 주제로 한 강연이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이었다. 손을 들고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곧 서른의 나이를 바라보는 때였다. 속으로는 조금 울먹이고 있었다. 시험 만능주의, 능력주의가 사회의 불행에 일조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시험 거부가 나의 '무능력'으로 환원되거나 '사회 탓'으로 비칠 것을 나도 알았다. 강의를 통해, 질문을 통해 내가 잘못 살고 있는 게 아니라는 위로를 받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물론 선생님께서도 명쾌한 답을 주시지는 못했다.
두려웠다. 내가 일반적인 삶 혹은 정상성에서 조금씩 밀려나고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언제 도태될지 모른다는 사실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 하지만 시험 주의를 비판하면서 시험을 준비하는 건 모순이었다. 그래서 시험을 봐야 할 수 있는 일은 우선순위에서 모두 배제했다. 그러고 나니 남는 일은 얼마 없었다. 후회와 포기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버티고 또 버티고 나니 남은 건 불안전한 노동시장에 몸을 맡겨야 한다는 현실뿐이었다. 그 아래에는 깨끗하고 완벽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부조리를 싶다면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걸 인정하지 못했다. 내 손과 삶을 더럽히지 않고 좋은 결과를 얻으려고만 했다. 팔짱을 끼고 밖에 서서 옳은 말을 하고 조언을 하는 걸로 내 몫을 다 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바꿔보려 했다. 하지만 그건 자만이었다. 목소리를 내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물러나게 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타인의 삶과, 수많은 이해관계와, 복잡하게 얽힌 인간관계 속으로 들어갈 용기가 없었다. 비난을 받거나 오해를 감수할 깜냥도 없었다. 그래서 안전한 책과 이론 속으로 숨었다.
청춘을 시험에 투자하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비난했다. 그 사람들이 이 사회의 문제를 더 견고하게 하는데 일조하고 있다고 여겼다. 모두가 나처럼 시험을 반대한다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 텐데 어째서 체제 수호자로 열심히 기능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시험을 통과해서 자격을 얻는 과정 자체에 구조적인 문제가 있음에도 그걸 공정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불만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시험을 보는 일을 피하며 살았다.
하지만 이 세상이 그렇게 굴러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해봐야 내 안의 불안과 우울만 커질 뿐이었다. 세상은 불공평하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렇게 본다면 시험 주의는 불공평한 사회에서 최소한의 기회를 보장받을 수 있는 기능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많은 청년들이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그걸 내멋대로 판단하거나 낙인찍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시험을 본다는 것이 사회의 문제에 눈 감겠다는 것을 꼭 내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시험거부인은 서른이 되어서야 시궁창 속으로 뛰어들어야 시궁창을 청소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지금까지의 시험거부에는 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반발감이 존재했음을 자각했다. 안타깝게도 시험을 거부하는데 몰두하느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고민하는 것을 미뤄왔다. 나의 지향이 아닌 타인에 대한 반발이 나를 이끌어온 셈이다. 이제는 더 미룰 수 없다. 나는 팔을 걷어붙이고 그 안으로 들어갈 결심이 되어 있는가. 혹은 그걸 포기할 만큼 생계에 대한 두려움이 큰가. 그리고 포기했을 때 좌절감과 무력감을 감당할 수 있을까.
어차피 내 인생이다. 이제는 결정하고 책임질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