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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호 Jun 06. 2016

청년문제가 대체 뭡니까

'청년문제'와 '청년'을 구분하자

난 20대다. TV만 틀면 청년실업, 학자금 대출 등 나를 겨냥한 듯한 기사들이 쏟아져 나온다. 근데 몇 살까지가 청년이고 뭐고 어디까지가 청년문제가 뭔지 모르겠다. 20대가 청춘이면 스물아홉이 취직 못하면 청년문제고 서른 살이 취직 못하면 청년문제가 아닌가? 어디 속 시원하게 말해주는 곳이 없다. 청년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청년문제가 해결될 리가 있나. 내가 청년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청년문제가 무엇인지 어디 한 번 들여다 보기나 하자.


청년문제의 '청년'은 무엇인가

세상은 문제 투성이다. 많은 문제들이 있겠지만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환경문제, 사회문제, 인권문제, 주거 문제, 등이 있다. 보기만 해도 머리가 복잡하니 이 단어들을 쪼개서 보자.


환경 + 문제

사회 + 문제

인권 + 문제

주거 + 문제


단어 뒤에 '문제'가 붙어 있다. 이렇게 생겨난 단어들은 '~문제' 앞에 있는 단어가 가지고 있던 의미 중 일부만을 선택할 수 있는 특징을 가지게 된다. 무슨 소리냐고?  


예를 들어보자.


A 지역의 사람들은 비가 한 번 오면 홍수가 나고 강의 범람하여 인명피해와 재산적 피해가 발생한다.

B 지역의 사람은 강수량이 너무 적어 가뭄이 들어 논밭이 쩍쩍 갈라지고 식수를 구할 수 없어 고생하고 있다.


이 경우 A 지역의 사람들은 환경문제라 하면 홍수를 떠올리고,

B 지역의 사람들은 가뭄을 떠올린다.


마찬가지로 청년문제는 모든 청년의 문제가 아니라 청년이 가진 문제 중 무엇인가를 선택하는 거다. 취직을 했지만 집을 살 돈이 없는 청년에게는 주거문제가 쳥년문제로 인식될 수 있고, 수 십장의 자기소개서를 써도 면접 한 번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청년에겐 취업문제가 청년문제로 인식되는 셈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2~30대의 사람들, 또는 사전적 의미의 청년(신체적ㆍ정신적으로 한창 성장하거나 무르익은 시기에 있는 사람 또는 성년 남자)의 모든 문제가 청년문제는 아니다. 청년문제를 말할 때의 청년은 사전적 의미의 청년과는 구분해야 한다.


A와 B의 교집합=청년문제

 

내가 생각하는 청년은 더 나은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이다. 더 나은 삶은 개인적인 삶의 풍요여도 좋고, 사회 전체의 성장이어도 상관없다. 조금 더 복지가 좋고 더 많은 연봉을 받기 위해 자격증을 따고 이직을 하는 사람은 개인의 성장을 택한 거고, 비정규직의 근무환경 개선을 위해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는 사람은 사회적인 성장을 택한 거다. 어찌 되었건 이들은 지금의 상황보다 한 발이라도 나아가려고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 만족하고 더 나은 삶을 원하지 않는다면 이들은 사전적으로 청년이라 하더라도 청년문제의 청년에는 속할 수 없다. 이미 현재의 삶이 만족스러운 사람들에겐 특별히 문제라 할 게 없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소개팅을 나가는데 양말을 짝짝이로 신었다든가 하는 문제는 그 사람에게는 시급할지 몰라도 당연히 청년문제에 속할 순 없다.


그렇다면 일본의 사토리 세대, 한국의 달관 세대들은 청년문제에서 말하는 청년에 포함이 될까? 물론이다. 이들은 분명 현재의 삶에 만족한다. 하지만 더 나은 삶을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청년문제의 청년과 동일하다.


이들이 현재의 삶에서 만족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은 아무리 노(오오오오오)력해도 희망이 없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애초에 높은 곳에 있어서가 아니라, 수 십 번의 시도 후에 올라갈 수 없다는 걸 깨닫고 포기한 거다. 문제에 대한 해결을 시도하다 실패한 자와 시도조차 하지 않은 자들은 분명 다르다. 이건 꼭 구분해야 한다.


노답이 지속되면?_ⓒ「MBC 다큐스페셜」화면 캡쳐
답 : 문화창조_ⓒ「MBC 다큐스페셜」화면 캡쳐

 

문제가 없는 청년들은 정말 문제가 없을까  

그럼 청년문제의 청년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 간단하게 말해서 먹고 살 걱정이 해결된 사람들이다. 흔히 말하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서 본인이 겪는 큰 문제가 없거나, 본인이 세운 목표를 어떠한 방법을 통해 달성해서 만족한 사람들이다. 나이가 많고 적고는 중요하지 않다. 20대여도 자신의 삶, 또는 사회가 더 나아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못 하면 청년이 아니다.


이 사람들에게 '요즘 청년들은 취직이 안 된다', '주거문제가 해결돼야 한다' 라고 아무리 외쳐봐야 소용없다. 이 사람들에겐 딴 나라 이야기다. 그런데 당장 먹고 살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정말 이들에게도 문제가 없을까.


저어어어어얼대! 아니다. 청년은 더 나은 삶을 지향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사회의 시스템이 이를 보장하지 않으면 청년이기를 포기하게 된다.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그만큼에 보상이 주어지지도 않으며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사회도 아니기 때문이다. 당연히 먹고 살 만큼만의 일을 하며 적어진 임금 내에서만 소비하기 위해 소비를 줄인다. 그럼 '난 문제없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에게도 문제가 생긴다.


일단 사람들이 힘든 일은 하지 않는다. 이미 더 나은 삶을 포기한 청년들은 힘든 일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 현재의 삶에 만족하는 법을 알아버린 자들이다. 조금 덜 일하고 조금 덜 벌어서 조금 덜 쓰면 된다. 그럼 외국에서 사람을 구해오면 되지 않느냐고? 당장이야 버티겠지만 청년이 없는 사회는 곧 망한다.


청년들은 그 물건을 살 돈이 없을 뿐 아니라 사야 할 이유도 없다. 그런 거 없어도 만족하고 잘 사는 법을 터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소비가 없으니 생산도 줄어들고 생산이 줄어드니 고용도 줄어든다. 이 과정이 끝없이 반복된다. 악순환이다.


하위 집단을 착취해야 하는게 자본주의의 기본 구조다. 아래부터 파괴되면 중산층이고 뭐고 그냥 다같이 죽는다.


청년문제는 전체의 문제다

결국 청년문제는 청년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기득권들은 청년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 기득권들은 이미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기에 문제가 있든 말든 상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년들은 자멸을 택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우리가 죽어야 그들이 문제를 인식하기 시작할 테니 말이다. 청년들의 자살만이 사회에 대한 유일한 저항이라 외치는 장강명의 『표백』이 그럴듯하게 들리는 것도 그 이유다.


당장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공장은 우리가 일을 하지 않으면 유지가 불가능하고, 우리가 세금을 낼 수 없는 처지가 되면 공무원들은 월급을 받을 수가 없다. 이를 위해서 우린 그 대가로 더 나은 삶 포기한다. 하지만 우린 정말 죽고 싶어서 포기한 것이 아니다. 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청년이 사라진 세대는 당연히 망한다. 사회를 하나의 생물로 봤을 때 운동, 생장, 증식에 가장 중요한 존재들은 청년들이다. 노동을 담당하는 것도 청년, 출산을 담당하는 것도 청년들로부터 시작된다. 청년문제 해결은 청년만의 몫이 아니라 우리 사회 모두의 몫이다.


살려달라고 협박하는 겁니다. 제발 살려주세요._ⓒ <MBC다큐스페셜>화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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