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3월 28일자
3월 28일자 중앙일보 맛있는 월요일에 기고한 글입니다.
잊혀졌던 여물끓여 먹인 소 이야기 입니다.
"웃돈 줄테니 화식우 좀 구해줘요"
소는 도축 후 발골(뼈와 살을 분리하는 작업)을 한다. 그래서 소의 속내는 발골 기술자들이 가장 잘 안다. 그들이 말하길 “사료를 먹은 소들은 발골할 때 피비린내가 나지만, 화식을 한 소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충북 제천 화식우 영농조합 김용철 대표는 이 이야기를 듣고 5년 전 시험 삼아 화식으로 소를 몇 마리 키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키운 화식우를 나이 지긋한 여성 소비자에게 국거리로 판매했다. 이 여성이 며칠 후 전화를 했다. ‘옛날에 먹던 쇠고기 맛이 떠오른다. 죽기 전에 좋은 고기 맛을 보여줘서 고맙다’는 인사였다. 그렇게 김 대표는 화식우의 가치를 알게 됐고 현재 360두 전부를 화식으로 키우고 있다.
시중의 한우는 암소·황소·거세우 등 세 종류가 유통된다. 이들은 육질 분류(사실상 마블링 함량)상 다섯 등급(1++, 1+, 1, 2, 3)으로 나뉘고 육량 등급으론 A·B·C로 나뉜다. 육량 등급은 뼈를 제외한 고기의 양으로, 양이 많이 나오면 A다. 육질 분류는 몇 가지 판단 기준이 있지만 사실상 등심에 함유된 지방의 분포도를 보고 판단한다. 기름이 골고루 예쁘게 퍼져 있으면 1++가 된다. 고기 맛을 지방의 분포로 판단하는 방법이다. 고기 내 지방이 많으면 구웠을 때 부드럽게 씹힌다고 생각해 우선적으로 구매한다.
같은 등급에서 부드러운 육질 순으로 매기면 암소, 거세우, 황소 순이다. 식당 간판에서 ‘암소 전문’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암소가 가장 부드럽다는 걸 내세우는 것이다. 거세우는 마블링 맛에 사람들이 집착하면서 본격 등장했다. 송아지 때 거세해서 사육하는 것으로 황소의 거친 고깃결을 암소처럼 부드럽게 만들려는 목적이다. 거세를 하게 되면 지방이 잘 축적돼 높은 등급을 받을 수 있다.
암소는 부드럽긴 해도 송아지를 낳기 때문에 30개월령 전후에 도축하는 거세우나 황소와 달리 도축 시기가 40~60개월로 늦다. 송아지를 많이 낳을수록 도축 시점이 늦어지고 부드러움의 정도도 덜해진다. 이렇게 황소·암소·거세우 일색이던 한우 시장에 새로운 강자가 등장하고 있다. 바로 화식우다.
화식우는 말 그대로 여물을 끓여 먹이는 소다. 소값이 논 한 마지기 값과 맞먹던 시절, 농가마다 한두 마리 키울 때 최소한의 먹이를 최대한 활용하는 사육 방식이었다. 사람도 식사를 할 때 익힌 것과 날것의 소화 흡수율이 다르듯 소 또한 마찬가지다. 목초나 옥수수 등을 대량으로 키울 수 없는 한반도에서 적은 사료 원료로 최대한의 효율을 끌어올리는 방식이 화식이었다.
하지만 1960~70년대 사료용 곡물이 본격 수입되면서 농가마다 사육 두수가 늘고, 전용 축산 농가들이 생기면서 쇠죽을 쑤어서 먹이는 사육 방식은 사라져 갔다. 전통 방식의 화식은 볏짚을 잘라 부산물과 함께 가마솥에 끓였지만 지금은 모든 과정이 기계화되었다. 제천의 화식한우영농조합은 전자동 방식으로 화식우를 기른다. 그래도 소에게 여물 한 끼를 주기 위해 드는 시간은 꼬박 12시간이다.
새벽 5시에 축사로 나와 6시간 찌고, 6시간 뜸을 들이는데 그 과정이 모두 전자동 시스템이다. 여물 주는 작업이 끝나면 저녁에 먹일 여물을 만드는 작업이 이어진다. 여물은 볏짚과 분쇄 옥수수, 콩 등을 섭씨 135도에서 쪄낸다. 이 과정에서 멸균도 이뤄지고 볏짚에 옥수수나 다른 곡물들이 부드럽게 스며들어 소들이 편하게 먹게 된다.
화식을 하는 소는 사료를 먹는 소들보다 상대적으로 물을 적게 마신다. 여물에 충분한 수분이 있기 때문이다. 소가 처음 화식을 접하면 낯설어 하지만 나중에는 푹 끓인 여물 맛에 매료돼 사료를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한다.
화식 사육이 사료 사육에 비해 노동 강도가 훨씬 더 세다. 그럼에도 화식우를 키우는 이유는 이유는 딱 하나 ‘맛’ 때문이다. 다른 쇠고기가 맛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거세우엔 마블링 맛이, 황소엔 특유의 육향이 있듯, 화식우는 화식우만의 맛이 있다.
‘순한 맛’. 화식우의 풍미를 표현하면 딱 이렇다. 고기 맛, 기름 맛, 기름이 타는 냄새조차 순하다. 순하면 밋밋할 것 같지만 단맛과 감칠맛의 지속성이 좋다. 부드럽게 씹히면서 입맛을 계속 당긴다. 그간 먹어왔던 쇠고기와 맛의 결이 다르다. 같은 등급의 거세우와 비교해서 씹힘성이 34%, 경도가 20%가 낮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이 때문에 고기를 살짝 구웠을 때도, 충분히 익혔을 때도 부드러운 육질을 맛볼 수 있다.
구워놓은 쇠고기가 시간이 지나면 맛이 확 떨어지는 경험을 누구나 했을 것이다. 화식우는 물성 자체가 식어도 부드러운 질감을 내기 때문에 충분히 맛을 음미하면서 먹을 수 있다. 쇠고기뭇국을 끓였을 땐 진가가 더욱 발휘된다. 단맛 좋은 무를 썰고 화식우 양지 부위를 볶다가 마늘·소금만으로 간을 해 뭇국을 끓였다. 잡내도 없고 은은한 쇠고기 향이 살아 있다. 국물이 깔끔했다. 귀한 쇠고기를 감히 구워먹지 못하던 시절, 국으로 끓여 온 식구가 나눠 먹던 시절의 맛이 살아 있다.
최근 쇠고기 마블링에 대한 과한 집착을 두고 쓴소리가 많이 나온다. 마블링이란 붉은 쇠고기 육질 사이에 눈꽃처럼 박힌 지방질이 마치 대리석(marble) 문양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결국 기름기가 소고기 등급을 결정짓는 상황이다.
이를 벗어나 쇠고기 본연의 맛, 즉 단백질의 감칠맛에 관심을 갖는 소비자가 늘었다. 가장 선호하는 등급이 1++에서 1등급으로 바뀌고 있다고 제천의 한 축산업 관계자가 귀띔한다. 이런 변화에 맞춰 사료 또한 등급 중심에서 육량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고 한다.
같은 맥락에서 숙성육(쇠고기를 진공 혹은 섭씨 1도의 냉장온도에서 15일에서 최장 70일까지 숙성시켜 맛을 증가시킨 것)을 내는 식당도 늘고 있다. 쇠고기 선택 기준이 다변화되는 건 반가운 현상이다. 이에 힘입어 화식우 생산농가도 조금씩 늘고 있다. 현재 전북 완주 고산과 정읍, 전남 화순, 충남 서산 등지에 있지만 서산과 제천을 제외하고는 사육 규모가 크지 않아 지역에서만 소비되는 정도다.
화식우는 다른 나라에서 보기 드문 한반도의 독특한 사육 방식이다. 게다가 식탁에서 직접 고기를 굽는 조리법 또한 우리의 고유한 방식이다. 전통 방식으로 키운 쇠고기를 우리 방식으로 조리한다면 스토리가 살아 있는 ‘음식 콘텐트’가 될 수 있다. 가격 면에선 수입육과 경쟁할 수 없겠지만 또 다른 ‘맛의 차원’을 열어줄 수 있다. 잊혀졌던 우리 쇠고기 맛이 농민들의 노력으로 부활하고 있다.
[출처: 중앙일보] 국 끓여 온 식구 먹던 “그 옛날 쇠고기 맛”
http://news.joins.com/article/197945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