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에 미친 공무원의 선택

싱글이 되고 퇴직

by 밀당고수 N잡러

2007. 2. 5. 아직도 잊히지 않는 날이다. 내가 골프채를 처음으로 잡아 본 날이다. 공무원 임용을 위해 과천 공무원교육원에 입소하기 직전으로 기억된다. 서울대입구역에서 봉천역으로 가는 대로변에서 서울대학교 쪽에 있는 지하 골프연습장 옆을 지나가는데 '퍽', '퍽' 소리가 났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마젤골프연습장'이라는 간판이 있었다.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저게 뭐라고 돈 좀 있는 사람들이 저기에 미치게 될까?

TV에서 보면 그냥 막대기로 작은 공을 구멍에 넣는 게 전부인 거 같던데.

이건희도 자기 맘대로 되지 않는 것 중 하나가 골프라면서 레슨을 받는다던대.


왜 부자는 골프를 칠까?

일단 부자들이 하는 거보면 분명히 재밌는 거니까 할 거고, 나도 그들처럼 살려면 해봐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끝나갈 무렵 나는 이미 지하 계단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골프 배우려고 오셨어요? 처음이신가요?"

"네, 지나가다가 간판이 보여서 한번 알아보려고요."

"여기 계시는 분 거의다 초보고 편한 시간에 오셔서 연습하면 되고, 아침 7시부터 저녁 11시까지 운영합니다."

"비용은 얼마나 하는지..."

"처음에는 아무것도 필요 없고, 여기 연습용 골프채가 있으니까 그냥 사용하시면 되고, 한 달에 15만 원인데 3개월 결제하면 12만 원입니다. 레슨은 무료로 해드리고요."


바로 카드를 꺼내 결제했고, 그날로 나의 골프 인생은 시작되었다.

아니 나의 미친 골프 인생이 시작되었다.


커다랗고 두꺼운 천에 대고 골프공을 7번 아이언으로 후려치면 밖에서 들리던 '퍽'소리가 안에서는 '펑'하고 메아리치는데 정말 10년 묵은 체증이 다 가라앉는 듯이 시원했다. 그리고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약간의 운동신경이 있어서 가르쳐 준대로 잘 따라 했고, 각종 책이나 인터넷을 보면서 이론도 읽혔다.


불광동에 있는 당시 식약청에 9시까지 출근하기 전에 연습장 사장님께 부탁해서 열쇠까지 받아 7시쯤 연습장 문을 혼자서 열고 한 시간 연습을 한 뒤 8시에 전철을 타고 9시 정각 도착했고, 6시쯤 퇴근 후에는 바로 연습장으로 직행해서 저녁을 시켜먹으면서 11시 문이 닫을 때까지 공을 친 게 딱 2년이었다. 모든 게 골프를 위해서였을 정도로 매일 실내연습장, 주말이나 금요일 저녁에는 낙성대에 있는 그물망 있는 인도어 실외 연습장, 주말이나 빨간 공휴일에는 어김없이 인터넷 동호회를 통한 라운딩, 한 달 한 번씩 어떻게든 핑계를 대고 연차를 써서 주중 골프를 쳤다.


당시나 지금이나 주말 골프장 그린피는 거의 18-25만 원이다. 여기에 4명이 사용하는 카트비가 8만 원이니 1/4로 2만 원, 캐디피 12만 원이니 1/4로 3만 원이면 주말 라운딩 한 번에 순수 골프비가 25-30만 원이다. 여기에 가서 먹는 점심과 저녁 두 끼, 기름값과 톨게이트 비용까지 하면 30-35만 원이고, 가장 중요한 내기 비용을 합치면 최소 40만 원이었다.


지금은 골프문화가 좋아졌지만 당시만 해도 모르는 사람끼리 내기를 해도 돌려주지 않았고, 핸디라고 잘 치는 사람이 못 치는 사람에게 일부 금액을 돈을 딸 것을 대비해 지급하지만 솔직히 30분 정도 2-3홀 정도면 이미 백돌이의 주머니는 비어 있게 마련이다. 당시 30대 중반의 나이라 같이 치거나 골프회원권을 가진 지인도 없어서 전적으로 여러 인터넷 골프동호회를 통해 라운딩 기회를 얻거나 실내연습장에서 알게 된 사람들이 전부였다. 문제는 이게 다가 아니라 돈이었다.


당시 월급 200만 원 정도를 받았을 때라 한 달 3-400만 원에 달하는 골프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대로 몇 년이 더 지나면 분명히 파산했거나 접대 골프를 치면서 뇌물에 빠져 결국 쫓겨났을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원래 돈이 많은 공무원은 계속 골프를 쳐도 된다. 하지만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공무원 월급으로는 주말에 여유롭게 골프를 치면서 싱글 골퍼가 될 수 없다.


내 경험으로 공무원 생활로는 골프를 계속 치는 게 어렵다고 판단했고,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저렴한 비용으로 주중에 골프를 많이 칠 수 있을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결과 어려서 해봤던 학원 강사가 그나마 일한 만큼 보상도 크고 사업처럼 위험부담 없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미 입시학원 쪽을 떠난 지 오래라 다시 밑바닥부터 하기도 어려웠고 무엇보다 영어, 수학, 과학을 해야 하는데 다시 공부를 하자니 앞이 깜깜했다. 그러던 차에 로스쿨이 생긴다는 뉴스를 접했고, 40년 가까이 법이나 변호사라고는 드라마나 영화가 전부였는데 지금 그것으로 밥을 먹고살게 되었다.


내가 골프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왜 부자들이 골프를 좋아할까라는 호기심과 부자들이 많이 치니까 나도 치면 그들처럼 살거나 그들로부터 무언가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함이었다. 그리고 공무원을 그만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부적응, 텃세, 작은 월급 등) 가장 큰 이유가 골프를 주중에 많이 치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난 꿈을 이뤘다. 변호사가 된 이후 초기에는 주중 20일 가운데 10일이나 골프를 친 달도 있었다. 새벽 골프를 치고 오후에 일을 하거나 오전에 재판이나 회의가 있으면 끝나고 오후에 가서 칠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주 1회 정도 치면서 주로 80대 초중반을 치면서 가끔 싱글인 78타나 79타 정도를 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아무나랑 치기보다 재밌게 칠 가까운 지인과의 골프만을 즐긴다.



내 인생에서 잘한 것을 몇 가지 꼽으라면 난 꼭 골프를 시작한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골프를 배워보라고 권하고 싶다.

나이 들어 80세가 돼도 할 수 있고, 부부가 하기 좋고, 요즘은 비싼 골프장이 아니라 스크린골프나 파3 골프장, 9홀 퍼블릭 골프장도 많아 자신의 형편에 맞춰 즐길 수 있다.


골프에 미친 공무원은 결국 공무원을 그만둔 덕분에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인생에 없던 로스쿨을 선택해서 변호사가 되었다. 운이 좋았지만 새로운 시도를 한 것이 좋은 결과를 얻게 된 것이라 믿고 싶다.


이전 09화성공한 공무원의 특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