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좀 더 단순하고 견고하게
사람마다 추구하는 삶의 가치관이 있다. 원하는 행복의 결도 각기 다르다.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행복의 조건들이 있긴 하지만 요즘에는 법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다양성은 인정해 주는 분위기다.
나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태도의 마지노선'이라고 부르고 있다. '기준'이라는 단어를 쓸 수도 있었지만 뭔가 최후의 상황에서 절대적으로 지켜내야만 할 것 같은 절박한 상황을 떠오르게 하는 '마지노선'이라는 단어가 내게는 좀 더 확 와닿았다.
단어를 내 삶에 끌어들인 첫 순간은 부모님께 용돈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스스로 재정 관리를 하기 시작한 때였다. 무언가를 사고 싶을 때, 누군가가 내게 돈을 빌리려 할 때, 적금을 할지 좀 더 입출금이 자유로운 통장에 넣어둘지 등등을 결정하는 기준을 '마지노선'이라 지칭하며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하려 애썼던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
사회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돈뿐만 아니라 공적인 관계 및 사적인 관계에서나 지인의 경조사 등등에서 내가 가지고 지켜야 할 태도에 대한 '마지노선'이 점점 늘어났다.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지극히 평범한 기준에 근접할수록 모나지 않을 수 있었고 다른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태도에 대한 '마지노선 평균값'을 찾는 일은 수학 문제 푸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분명 여기서는 '괜찮은 기준'이었을지라도 어떤 곳에서는 뒷담화하기 좋은 '썅년'이 될 최적의 조건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니 '유연하면서도 심지가
단단한' 기준을 세울 수 있게 되면서 차츰 정리할 수 있었다. 법의 기준은 절대적으로 지키면 됐지만 다소 모호할 수 있는 도덕적 기준을 고려하는 건 어려웠지만 수정해 나가면 되는 일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또한 삶의 가치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좀 더 수월하게 선택지를 고를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어차피 내가 어떤 기준을 세우던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과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늘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 스스로 부끄럽지 않다면 그걸로 된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크리스천으로서 믿음의 기준에서도 고려하려 했지만 여전히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듣다가 얼굴과 귓바퀴가 발그레 붉어질 때가 아직도 많긴 하다.
'태도의 마지노선'을 정하는 과정은 실로 어려운 작업이다. 그래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고 수정 중이다. 하지만 이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전보다 의사 결정을 내리는 시간이 훨씬 줄었다는 점, 되돌아보고 곱씹는 과정이 줄었다는 점, 자다가 이불킥을 날리거나 후회하는 일이 점점 사라졌다는 점이다. 생각의 과정은 더 단순해졌지만 더욱더 깊어지고 견고해졌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사색하는 일을 즐기는 태도가 뼛속부터 파고든 사람이라 할지라도 가끔은 버거울 때가 있기 마련이다.
나는 '태도의 마지노선'을 통해 그로 인한 고단함을 덜어낼 수 있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내가 좀 더 깊이 생각하고 싶은 것에 더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주어진 에너지와 시간을 여러 개로 쪼개어 나눠 써야만 하는 상황에서 원하는 곳에 원하는 만큼 융통성 있게 에너지와 시간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만큼 설레고 합리적인 일이 또 있을까?
성인이 되면 의사결정에 대한 '자유'와 그에 따라 주어진 '책임'이 양손에 하나씩 쥐어진다. 그동안 '가정과 부모'와 '학교와 선생'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보호를 받아왔지만 성인이 되는 순간부터는 어느 한쪽이 더 커지지 않게 균형을 유지하며 스스로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새해가 시작된 오늘, 목표와 계획을 세우면서 내 삶에서 추구하고 다른 이들과 잘 살기 위한 '태도의 마지노선'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시길 추천한다. 생각이 많고 완벽하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