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문을 쓰면서
사실 떼쓰기라기보단 서운한 마음을 표현하는 아이의 울음이었음을 나는 분명 인지하고 있었다. 출근하는 아빠를 안아주지 못하고 인사하지 못한 아쉬움의 눈물이라는 걸 명확하게 나는 알고 있었다. 바닥에 앉아 울고 있는 아이를 일으켜 내 품에 안기고 등을 토닥이며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말해줬지만 어찌 됐든 결론은 '지금으로서는 아빠가 다시 집으로 올 수 없다. 아빠는 이미 출근하셨고 지각할 경우 혼나시게 된다. 전화 말고는 방법이 없다. 자, 전화 통화라도 할래?'
고개를 흔드는 아이, 점점 올라오는 짜증. 결국 내 입에서는 짜증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말도 안 되는 대안책(엄마에게는 더 이상 방법이 없다. 그럼 아빠 찾아가 봐)과 한숨 몇 번 쉬고 짝꿍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아이는 아빠와의 영상 통화를 끝으로 진정될 수 있었다. 진정된 아이가 다시 내게로 와 안겼다. 모질게 말한 엄마에게 안길 때 아이는 어떤 감정이었을까?
아이의 감정을 제대로 어우러 주지 못한 엄마가 되었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몰려왔다. 아이에게 사과는 했지만 글을 쓰는 지금도 사과의 말속에 나의 '자기 합리화'가 들어있었을까 봐 마음이 무겁다. 내가 아이의 나이였을 때의 모습들 일부가 뇌에 저장되어 있는 나인데, 엄마만 안 보이면 울었던 그때의 감정과 생각이 여전히 생생한 나인데 조금만 더 아이를 다독이고 마음이 진정되기를 기다려주지 못했나.
출근하는 짝꿍에게 인사하고 난 후 아이가 깨어나기까지 존재하는 찰나의 시간에 오롯이 나만의 시간이길 바랐을까? 잠시 눈 좀 붙이고 싶었을까? 예상치 못하게 눈을 뜬 아이가, 쉽게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는 아이를 보며 소진되어 가는 시간이 아까웠을까?
나 정도면 괜찮은 어른이라 생각했다. 최소한 약자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갑의 위치에서 을의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겠지만 예쁘게 말을 하고 선한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라고 내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다면 오늘 아침 나는 나보다 나이가 어린아이에게 '엄마'라는 위치에서 짜증 섞인 말도 안 되는 말을 하고 있을 때, 내가 아이에게 준 선한 영향력이라는 건 뭐였을까?
감정 코칭은 육아하는 부모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교육 중 하나라고 보기에 관련 책들을 종종 읽으며 공부하고 있다. 책들은 모두 아이의 감정 코칭을 하기 전 부모의 감정부터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감정을 가르친다는 건 지식을 전달하듯이 알려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부모가 감정을 다루는 모습을 직접 아이에게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가장 효과가 좋은 교육 방법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부모와 감정을 공유하는 과정 속에서 부모가 여러 감정들을 다루는 모습을 모방하며 성장하는 아이이기에 부모가 스스로 느끼는 감정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
그나마 희망이 있다면 저자들 또한 나와 같은 과정을 겪었다는 점이다. 심지어 어느 저자는 본인이 그 분야에 전문성을 갖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아이에게는 큰소리를 냈다며 고백하는 경우도 보았다. 그러한 저자들의 용기 있는 고백이 나로 하여금 '나도 다시 해보자'라는 도전 의식이 생기게 한다.
아이의 인성 교육은 좋은 선생님의 지도하에 좋은 교육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부모의 태도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임을 깨닫고 있는 요즘, 육아도 처음이고 부모 역할도 처음이라 서툰 게 많지만 나는 어른이기에 아이보다 더 아프고 힘들지라도 먼저 더 성숙한 사람이 되어 아이를 이끌 수 있는 '엄마'가 되어야겠다고 다시 한번 굳게 다짐해 본다. 오늘은 비록 괜찮지 못한 어른이었지만 내일은, 한 달 후에는, 1년 후에는 꽤 괜찮은 어른이 되어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