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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 너머를 읽다(영상 분석)

by 최용윤

경기장에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휘슬이 울리고, 바퀴가 부딪히며, 순간의 판단과 투지가 코트를 가른다. 하지만 진짜 승부는 때로 경기가 끝난 후, 조용한 분석실에서 다시 시작된다. 나는 휠체어농구 국가대표팀의 코치로 활동하며 수많은 장면을 현장에서 직접 목격했다. 그러나 정작 가장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준 것은, 경기 후 다시 마주한 영상 속 장면들이었다. 그곳에는 실시간으로는 보이지 않았던 실수와 가능성, 그리고 선수들의 숨겨진 움직임이 담겨 있었다.


휠체어농구는 그 어느 종목보다 빠르고 복잡하다. 선수들은 의자 위에서 회전하고, 전진하고, 스크린을 만들며 상대의 허점을 노린다. 그 속도를 실시간으로 따라잡기란 감독도, 관중도, 선수 자신조차도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경기가 끝난 뒤, 촬영된 영상을 통해 다시 경기를 ‘읽는다’. 영상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눈으로, 우리가 놓친 장면들을 다시 보여준다. 단순히 누가 실수했는지를 지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왜 그런 상황이 벌어졌는지를 이해하기 위한 과정이다. 어떤 수비 로테이션이 늦었는지, 어느 구역에서의 슛 성공률이 낮은지를 찾아내는 이 과정은 결국 ‘왜 졌는가’보다 ‘어떻게 이길 것인가’를 고민하게 만든다.


영상 분석은 대개 촬영, 편집, 분석이라는 세 단계를 거친다. 경기는 태블릿이나 고정 카메라로 촬영되며, 가능하면 전체 코트를 담을 수 있는 앵글이 확보된다. 이렇게 촬영된 영상은 곧바로 컷 편집을 거친다. 단순한 하이라이트가 아닌, 팀 전술의 흐름을 중심으로 의미 있는 장면들—예컨대 수비 전환 시점, 셋오펜스 실행 결과, 리바운드 위치 실수 등—을 골라내고 정리한다. 이후 분석 소프트웨어를 통해 장면 위에 선을 긋고, 움직임을 추적하고, 공간의 간격을 시각화하며 팀 전체의 움직임을 구조적으로 해석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도출된 피드백은 선수들과의 미팅에서 공유되며, ‘눈으로 확인하는 대화’가 된다.


그렇다면 좋은 영상 분석이란 무엇일까? 단순히 반복해서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코트에 흐르는 ‘의도’를 읽어내려면 분석가에게도 전략적 감각이 요구된다.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나만의 몇 가지 분석 노하우를 공유하고 싶다.


첫째, 스페이싱을 읽어라. 휠체어농구는 움직임보다 ‘간격’이 더 중요하다. 선수들 간의 거리와 배치가 전술 성공의 열쇠다. 이를 위해 영상을 정지시키고, 프레임 위에 선을 그어가며 어느 시점에 어느 간격이 유지되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예컨대 3:2 셋오펜스에서는 탑 플레이어가 언제 외곽으로 빠졌는지, 센터가 어느 타이밍에 스크린을 시도했는지를 확인해보자. 공간을 제대로 썼는지 여부는 득점보다 더 정확한 팀의 이해도를 보여준다.


둘째, 볼이 없는 움직임에 집중하라. 초보 분석자는 대부분 공을 따라간다. 하지만 실제 승부는 ‘공이 없는 곳’에서 벌어진다. 한 선수가 패스를 받기까지 그 뒤에 일어난 다른 네 명의 움직임이 중요하다. 특히 오프볼 스크린, 헬프 디펜스의 위치, 세컨드 로테이션의 반응 속도를 프레임 단위로 분석해보라. 결정적인 장면은 종종 카메라 중심에서 벗어난 곳에서 시작된다.


셋째, 실패 장면만큼 성공 장면도 분석하라. 우리는 흔히 실수나 패배의 원인을 찾는 데 집중하지만, 오히려 성공한 공격이나 잘 막아낸 수비 장면에서 팀의 강점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 수 있다. ‘무엇이 잘 작동했는가’를 파악하고, 이를 반복 가능한 패턴으로 정리하는 것이 분석의 핵심이다. 분석이란 잘못된 부분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잘했던 장면을 의도적으로 재현하기 위한 도구다.


넷째, 선수 개개인의 리듬과 타이밍을 이해하라. 예를 들어 한 선수가 드리블 후 패스를 하기까지 걸리는 평균 시간이 몇 초인지, 슛 모션은 어떤 패턴으로 연결되는지를 수치로 잡아두면 선수의 경기 리듬이 보인다. 이를 바탕으로 타 팀과의 매치업 전략도 훨씬 정교해진다. 영상은 단지 장면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이러한 분석의 중요성은 국제 무대에서도 입증되었다. 2020 도쿄 패럴림픽 당시, 대한민국 휠체어농구 국가대표팀은 매일 밤 늦도록 분석실의 불을 끄지 않았다. 대한장애인체육회는 당시 보도자료를 통해 “경기 전날 상대팀의 2~3경기 영상을 분석하고, 주요 선수의 슛 패턴과 수비 위치를 파악하여 전략을 조정했다”고 밝혔다. 그 결과, 일본과의 예선 경기에서는 전반까지 팽팽히 맞서던 흐름이 3쿼터 이후부터 우리 쪽으로 기울었다. 이는 단순한 체력이나 기량의 결과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분석을 통한 통찰, 그리고 선수들과 코칭스태프의 집요한 준비의 산물이었다. (출처: 대한장애인체육회 보도자료, 2021년 8월)


요즘은 영상 분석의 진입장벽이 낮아지고 있다. 스마트폰 하나만으로도 Coach’s Eye나 Hudl 같은 앱을 통해 느린 재생, 주석, 비교 분석까지 가능하다. 국제휠체어농구연맹(IWBF)은 자사 홈페이지에서 다양한 경기 영상과 통계 자료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어 누구든지 실제 경기를 바탕으로 분석 연습을 해볼 수 있다.
(출처: IWBF 공식 홈페이지, www.iwbf.org)


영상 분석을 통한 가장 큰 변화는 선수들의 태도다. 나는 분석 미팅을 마친 후, 선수들의 표정이 달라지는 순간을 여러 번 목격했다. 그들은 자신의 실수를 변명하지 않는다. 대신, "아, 그래서 그 장면에서 내가 늦었구나", "이 위치에서 스크린을 해줘야 했네" 같은 말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이 말 속에는 자책보다 반성과 이해가 담겨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진짜 성장이 시작된다. 분석은 ‘틀렸다’고 말하는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하는 기회다.


휠체어농구는 단지 휠체어를 탄 채 치르는 경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전략의 스포츠이며, 협력의 스포츠이며, 동시에 끊임없는 관찰과 성찰의 연속이다. 코트 위에서의 움직임은 전부가 아니다. 경기 후 영상을 통해 다시 만나는 자신의 모습 속에, 어제보다 나은 자신이 숨어 있다. 진짜 승부는, 그때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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