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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oomanist Dec 19. 2023

이제 막, 흘러넘치게.

오늘 한 장, 윤하의 물의 여행(Wish)

 조각글 모음은 노래를 듣고 떠오른 이미지를 글로 옮기는 글쓰기 연습 프로젝트입니다.

 주관적인 창작글이니 가볍게, 노래와 함께 즐겨주세요.


https://youtu.be/SIUaE6C3GPw?si=UVviOE9ezuAN623_

윤하 - 물의 여행(Wish)

 창문 밖 메마른 화분엔 떨어지는 빗물만이 고여 있다. 그곳에 뿌리내렸을 생명은 온 데 간 데 찾을 수 없었고, 반쯤 고인 웅덩이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만이 나이테를 대신해 끝없이 원을 그렸다. 바람이 불어오자 가을빛으로 말라가는 잎이 부딪히는 소리가 빗소리와 함께 들려온다. 단풍이 들기도 전에 내리는 비에 나무는 속절없이 잎을 떨군다. 그 모습을 지그시 노려보며 손에 든 찻잔을 살짝 움켜쥐었다. 손등을 반쯤 덮은 하얀 옷 속으로 찻잔에 온기가 퍼져왔다. 한 모금 차를 들이키며 더욱 맹렬히, 화분 속 빗방울을 노려본다.


 빈 화분엔 빗물이 속절없이 차올랐다. 몇 해전 내 모습 같았다. 준비 없이 만난 사회는 내리는 비와 다르지 않았다. 나에겐 비를 피할 지붕은커녕 우산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저 추위를 견디기 위해 몸을 잔뜩 웅크릴 수밖에. 시간이 지나 이젠 어디에 비를 피할 곳이 있는지, 어디서 우산을 빌릴 수 있을지도 안다. 몸으로 견디며 쌓은 시간은 비를 피하는 법을 내게 알려줬다. 하지만 비와 바람은 멈출 줄 몰랐고, 발끝부터 조금씩 나는 젖어만 갔다.


 다행히도 주변에 동료는 점점 늘어났다. 매년 조금씩 늘어가던 동료는 어느새 한 줄기 강물이 되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못하고 고여있지도, 목적 없이 휩쓸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려온 곳이 바다가 아닌 호수일 줄은 결코 알지 못했지만. 그곳은 절벽에 둘러싸인 조금 더 큰 웅덩이에 불과했다. 나는 다시 멈추고 말았고, 내리는 비를 속절없이 맞을 수밖에 없었다. 더욱 맹렬히 쏟아지는 빗줄기는 호수의 표면을 파낼 듯이 부딪혀 왔다.


 제법 긴 휴가를 냈다. 그동안 일에 치여 쓰지 못한 연차가 잔뜩 쌓여있던 덕분에, 잠시 멈춰 생각할 시간을 구해냈다. 방 한편에 쌓인 읽지 못한 책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자 했지만, 부서 이동부터 퇴사와 이직까지 고민은 멈춰지지 않았다. 하릴없이 책을 덮고 노트북을 꺼내 그간의 업무를 정리했다. 쌓인 시간만큼 그럴싸한 결과물이 손에 잡혔다. 그저 고인 물 같았던 호수는 보다 넓어진 나의 그릇이었고, 경험이었다. 떨어지는 빗방울을 하나하나 움켜쥐며 어떻게든 키워낸 가능성이었다.


 순간 노려보던 화분에 물이 넘치기 시작했다. 찬찬히 차오르던 빗물은 마치 이 한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갑작스러운 변화였지만, 조금씩 고여있던 수많은 빗물이 긴 시간 모여 만들어낸 결과였다. 언제나 변화는 갑작스레 찾아왔다. 마음속 호수도 쏟아지는 빗물을 견디지 못해 무너져 내리며, 절벽 위로 폭포를 그려냈다. 쏟아지는 물소리가 시원하고 경쾌하다. 그간의 빗물이 터져 나오듯 쏟아졌다. 물줄기는 새로운 땅에 부딪히며 호수보다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는 이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보다 낮은 곳일지언정 더욱 넓고 깊은 곳을 향해, 물은 흘러갔다.


 이제 막, 흘러넘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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