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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oomanist Nov 29. 2023

우리술 인문학 1편 - 전통주 근현대사

우리술의 과거와 현재

 북촌에 위치한 전통주 갤러리를 다녀왔다. 무료 시음부터 큐레이션까지 다양한 행사가 진행되고, 전통 다과와 함께 차나 음료를 즐길 수 있는 카페도 함께 있다. 오늘은 가까우면서도 먼 술, '우리술'을 상에 차려보려 한다.


 우리술. 전통주나 민속주라는 이름이 다소 무겁고 딱딱해서 보다 애정하는 단어다. 보통 우리술이라고 하면 소주와 막걸리를 떠올린다. 가격도 착하고 우리가 실질적으로 가장 많이 접하는 술이다. 삼겹살에 소주 한 잔, 비 오는 날 파전에 막걸리를 누가 싫어할 수 있을까. 하지만 우리술은 이게 전부가 아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술부터 보다 깊은 이야기와 높은 미식 경험을 선물해 줄지도 모를 술까지 정말 다양하다.

 북촌에 위치한 전통주 갤러리는 카페와 함께 한식 갤러리도 운영하고 있다. 전시 공간에 이런 말이 쓰여있다.


한식은 우리나라 고유의 정서가 담긴 문화유산이다


 우리 술 역시 한식과 함께 전해져 내려온 문화유산으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국내에선 아직 인지도가 굉장히 낮다. 최근 유행처럼 한식 주점이나 한식 다이닝이 생겨도 여전히 한식 주점에서는 희석식 소주를, 한식 다이닝에서는 와인을 찾는 게 일반적이다. 평소에 먹기엔 비싼데, 좋은 날 먹기엔 애매하단 게 보통의 인식이다. 하지만 페어링이나 마리아주를 중요하게 여긴다면, 한식에 가장 잘 어울릴 술은 역시, 나아가 한국인에게 가장 잘 맞는 술은 단언컨대 우리술일 수밖에 없다.


우리술 근현대사


 갤러리를 둘러보면 정말 많은 우리술이 보인다. 그런데 우리는 어째서 서울이라면 참이슬과 장수 막걸리만을 알게 되었을까. 시작은 일제강점기(1910-1945)이다. 그들은 우리의 언어와 문화를 없애려 했던 것처럼 우리 술 말살 정책도 진행했다. 이 36년 사이 대부분의 전통주가 죽어버렸다. 이후엔 식량 문제가 따라왔다. 6.25 전쟁(1950-1953)과 군사 독재(1961-1988)를 비롯한 근현대사의 악재는 끝이 없었고, 정부는 먹을 쌀도 없는데 다량의 쌀이 술에 쓰이는 걸 볼 수 없었다. 결국 쌀로 약탁주를 만드는 건 금지됐다(1963-1977). 이 시기는 혼분식 장려 운동과 절미 운동으로 나라에서 식당이나 숙박 접객업엔 잡곡과 밀가루 혼합률을 강제하고, 도시락에도 백미만 싸가는 거를 단속하던 수준이었으니, 어마어마한 양의 쌀을 사용해서 술 조금 만들어내는 전통주는 당연히 금지될 수밖에 없었다. 그 반작용으로 밀가루 막걸리나 고구마 등 전분질을 활용한 주정으로 만드는 희석식 소주가 유행하는 바탕이 만들어졌다. 자연히 우리술의 명맥은 끊기고, 수준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전통주 문화가 가장 발전했던 시기는 조선 시대 500년이었는데, 당시엔 집마다 김치와 장을 담그듯 나름의 가양주를 모두가 만들던 시절이었다. 그 많던 전통주는 전쟁과 식량 문제, 이후엔 세금과 면허, 여러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해 무너지고야 말았다.


 우리가 참이슬과 장수 막걸리만 알게 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대한제국 시절부터 주류세로 다양한 근대적 세법을 도입하던 정부는 70년대에 이르러 대한주정판매(주)를 설립하며 주정 공판제를 실시한다. 주정 공판제는 주정을 만들 수 있는 업체를 정부가 허가하고, 만들어진 주정을 모두 독점 구매한다. 그리고 허가받은 주류 제조 업체에 정부가 직접 유통판매하는 방식이다. 정부가 주정의 유통을 직접 관리하여 술로 발생하는 여러 문제를 예방하겠다는 취지인데, 사실상의 독점 판매 법안이다. 이미 주류 제조 면허와 다른 술보다 불리한 세금 정책, 쌀 사용 금지 등으로 전통주의 명맥이 흔들리던 시기에, 저렴한 전분질 원료를 통해 만든 주정을 독점 판매 해서 보다 효율적인 세수 확보를 이뤄냈다. 저렴한 희석식 소주를 만드는 모든 주정은 대한주정판매를 통해서만 공급받게 되었고, 소규모 소주 회사나 증류식 소주를 만드는 장인들은 모두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막걸리 또한 마찬가지다. 1980년대에 들어 정부는 수백 개의 막걸리 양조장을 통폐합시켜 지역마다 판매 독점권을 부여했다. 서울은 50여 개의 양조장이 하나로 합쳐진 일종의 조합이 되어 서울장수막거리만 팔 수 있게 되었다. 이 독점권은 2000년대에 와서야 풀렸지만, 한 번 자리 잡힌 독점 구조는 지금까지 쉽사리 변하지 않고 있다. 때문에 서울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은 정말 긴 시간 우리 술 하면 진로와 장수막걸리만 떠올리게 되었다.


우리술의 발전


 그럼에도 지금 우리는 정말 많은 우리 술을 만날 수 있다. 이 터닝포인트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이다. 달라진 한국을 처음으로 세계에 알렸던 행사. 수많은 외국인 관광객과 정상이 한국을 방문하는 행사였고, 정부는 그제야 전통주를 찾게 된다. 이때 흔히 말하는 국가지정 8대 민속주가 정해졌다. 서울 문배주, 면천의 두견주, 경주 교동법주, 안동소주, 한산 소곡주, 전주 이강주, 김천 과하주, 지리산 국화주가 8대 민속주에 해당한다. 밀주 취급을 받거나 정말 밀주로 전해지던 민속주들이 처음으로 인정받은 계기였다. 


 이후엔 이렇게 농림축산식품부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를 필두로 국가에서도 전통주 알리기에 힘쓰고 있다. 전통주 갤러리는 물론이고, 더술닷컴이나 찾아가는 양조장, 우리술 품평회 등 다양한 노력이 보이는 요즘이다. 


 최근 더본 코리아의 백종원 대표가 홍보했던 예산 명주 페스타 역시 전통주를 더 알리고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정부와 기업, 명인분들과 애호가를 비롯해 정말 많은 사람이 우리술 복원과 부흥을 위해 애쓰고 있다. 전통주는 그저 복원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거기서부터 맛과 향을 더욱 발전시키고, 다시 우리 문화로 자리 잡아야 하기에 가야 할 길이 지극히 험난하다.


 그렇다고 마냥 어렵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한식 세계화에 대한 정부와 기업의 니즈는 언제나 강렬하고, 여기엔 우리술이 함께할 수밖에 없다. 시장 또한 대부분의 사람이 여전히 우리술하면 희석식 소주와 장수 막걸리만 떠올리고 있기에, 세계가 아닌 국내에서도 확장 가능성이 넘쳐난다. 


 그렇다면 진로 소주와 장수 막걸리가 아닌 우리술은 무엇이 있고, 과연 무엇이 그렇게 다를까. 다음 글에선 이러한 궁금증을 한 번 풀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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