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에게 아파트 한 채를 사주겠다던 꼬마는 자라서

겨우 내 집 한 칸을 샀습니다

by 낮잠
할머니, 내가 나중에 커서 할머니한테 아파트 한 채 사줄게

7살 꼬마가 할머니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고마움의 표현이었다. 할머니는 비 오는 놀이공원에서 울며 떼쓰는 꼬마를 업고 하루 종일 고생했다고 한다. 할머니 등에 업히기 좋은 나이(?)였던 7살 꼬마는 할머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꼬마는 약속을 했다. 커서 어른이 되면 아파트 한 채쯤은 할머니에게 사드리겠다는 약속. 7살만이 할 수 있는 배포가 큰 약속이었다.


그 꼬마는 나였다. 내 기억 속에는 없는 내 모습이지만 할머니의 기억 속에 그 장면은 계속 살아 숨 쉬고 있었다. 할머니는 기회만 되면 내가 꼬마 시절에 했던 약속에 대해 상기시켜 주었다. 그 이야기를 풀어낼 때마다 할머니의 얼굴은 즐거워 보였다. 정말 아파트 한 채를 선물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대출을 어마어마하게 끼어야만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처음으로 내 명의의 집을 구했고, 처음으로 누군가를 초대해도 괜찮은 집을 구했다.


그동안 할머니는 서울에 올라올 일이 있을 때마다 넌지시 '손녀가 사는 집을 한 번 보고 싶다'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나는 그때마다 할머니를 초대할 수 없었다. 집이 너무 작아서 멀리서 올라온 할머니를 주무시게 할 만한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살림살이 정리를 도와주러 온 엄마만 하루 이틀쯤 겨우 묵고 갈 수 있는 집이었다.


"에이. 집도 좁고 불편해요. 힘들게 오지 마세요."

이런 나의 대답에도 할머니는 언제나 내가 사는 집이 궁금했을 것이다. 아파트 한 채를 통 크게 사주겠다던 순진한 꼬마가 독립하고 어떻게 생활하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 한 사람 챙기기도 벅찬, 원룸 하나 관리하기도 벅찬 그저 그런 어른이었다. 그런 나에게 처음으로 가족들을 전부 초대할 수 있는 집이 생겼다.


"할머니는 아무래도 연로하셔서. 같이 가기는 좀 힘들 것 같아."

이사 당일 엄마의 문자가 왔다. 잊고 있었다. 곧 마흔을 바라보는 꼬마의 나이만큼이나 할머니의 세월도 흘러가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할머니께 보여드릴 수 있는 집을 샀는데 할머니가 오기 힘들어졌다는 게 아쉬웠다. 어쩔 수 없이 할머니를 제외한 가족들만 내 집을 보러 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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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다음날이었다. 열심히 고른 식탁도 배송받지 못했고, 새로 주문하게 된 옷장도 설치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짐 정리가 덜 되어 있었다.

아직 완벽하지 못한 집을 가족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조금은 아쉬웠다. 짜잔, 하고 보여주고 싶었는데 현실은 그러지 못했다.


그런 내 마음과는 달리 다른 가족들은 그저 시끌시끌, 정신없어 보였다. 내 집을 찾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수화기너머 들뜬듯한 가족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여기 주차장을 못 찾고 있어. 입구가 여러 개인 것 같은데 지금 보이는 입구는 못 들어간다네? 어디로 들어가야 되는 거야?"


"외부인은 1번 게이트로만 들어올 수 있다고 계속 설명했는데 다른 게이트로 가니까 그렇지. 네비에 1번 게이트 검색해서 들어오라니깐."


"1번 게이트? 아파트 이름 검색해서 왔는데 모르겠어. 이제 들어와서 동 찾고 있어. 동은 또 어디에 있나."


"표지판에 숫자 쓰여 있는 거 보고 잘 찾아봐. 지하로 더 내려가야 우리 동이랑 연결되는 것 같은데."


"아 그래? 여기다! 여기. 차 여기 세워봐. 찾은 것 같은데 문은 어떻게 열고 들어와?"


"동 앞에 출입문 있는 곳으로 왔어? 내 방 호수 누르고 호출해도 되고. 아니면 내가 내려갈 테니까 기다려봐."


"아니 됐어 됐어 됐어. 호수 눌렀어. 여기 맞잖아 눌렀다고 @#%@#%$@#!@#%$@#......."


전화기 너머 이게 맞니 저게 맞니, 하는 가족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밖에서 주차장으로 진입할 때 조금 헤맸던 것 같던 가족들은 내가 마중 가려 준비하는 사이에 문 앞 현관까지 예상보다 빠르게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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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와. 아직 주문한 가구도 덜 왔고. 그래서 아직 뭐가 없긴 한데."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변명처럼 말했다. 하지만 가족들의 눈은 초롱초롱했고, 심지어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이사 후 피로에 절어있던 나와 다른 분위기인 가족들을 보고 나의 마음도 편해지기 시작했다. 엄마는 이 방 저 방 들어가서 궁금한 것들을 열어보면서 살림살이에 대해 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아빠는 거실에 우두커니 서서 창문 밖 풍경을 구경하기도 하고, 엄마와 같이 싱크대나 집 안 몰딩들을 보며 '이건 우리 집이랑 비슷하네', '이건 우리 집도 이렇게 했으면 좋았을 텐데.', '우리도 이렇게 해 볼까.' 하면서 모델하우스에 온 부부처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동생은 작은 방에 본인 짐을 풀고 핸드폰을 보며 장거리 운전의 여독을 풀고 있었다.




밤이 되고 온 가족이 거실에 이불을 깔고 누웠다. 침실에 있는 좋은 침대에 누워 주무시라는 나의 권유에도 부모님은 거실에 이부자리를 펴고 누웠다.


"아빠는 침대 그런 거 필요 없다. 땅바닥에 아무것도 안 깔고 자라고 해도 충분히 행복할 것 같다."


"거실은 해 뜨면 빛이 많이 들어와서 일찍 깨야해. 피곤하지 않겠어? 침실 가서 자지."


"아빠는 여기가 좋다. 이런 집은 어디서 알아보고 구했냐."


예상과는 다른 가족들의 반응이 의외였다. 특히, 잔소리꾼 아빠가 할 것으로 예상했던 잔소리를 전혀 듣지 않았다.

대출은 얼마나 많이 받은 거냐.
인구가 줄어드는데 지금 집을 사도 되겠냐.
층수가 너무 높은 거 아니냐.
너무 비싼 집을 산 거 아니냐.........


이런 말들을 예상했다. 하지만 아빠도, 엄마도 그냥 좋다는 말만 연신 했다.


"이만하면 됐다. 더 필요도 없다. 여기서 평생 살아라."


'다음엔 방 세 개에 화장실 두 개인 집으로 가야지'라는 나의 말에 아빠는 말했다. 아빠의 행복은 최고조였다. 내가 대학에 합격했을 때, 취업에 성공했을 때 보았던 아빠의 행복을 오랜만에 보았다. 친척들에게 전화를 돌렸다고 한다. 우리 딸이 어느 동네에 집 샀다고 했더니 거기 좋은 동네라고 했다고 한다. 대학에 합격했을 때, 취업에 성공했을 때 그랬듯 아빠는 또 친적들에게 자랑을 했다.


할머니도 분명 좋아하셨을 것이다. 할머니는 이제 장거리로 움직이면 많이 힘들다고 하신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할머니의 행복한 표정이 그려진다. 우리 손녀가 잘해놓고 사네. 아파트 한 채 언제 사줄 거냐고 나를 놀리던 할머니의 행복한 표정이 보인다.


할머니도, 아빠도, 엄마도, 동생도. 생각해 보니 가족들의 표정이 전부 똑같았다. 내가 이룬 것을 나보다 더 기뻐해주는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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