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에게 돔황챠라고 말하는 독한 직장인

이직사관학교에서 10년 넘게 버틴 직장인

by 낮잠

비품 창고에서 부지런히 일을 하고 있는 참한 인턴 후배가 보인다. 지나가던 나는 그녀에게 조용히 다가가 속삭인다.


"돔황챠"

이런 뉘앙스의 말을.


"우리 회사 박봉에, 업무도 현타 많이 와요. 능력 되면 빨리 도망치세요."

나에게는 이런 말을 해 주는 선배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런 말을 하는 선배가 되었다. 신입에게 도망치라고 말하는 조금 맛이 간 선배. 그 사람이 바로 나다.


그런데 착하고 모범적인 우리 신입님들은 '도망치라'는 나의 말을 들으면 오히려 더 애사심을 갖고 회사를 다니는 것 같아 보였다. 그래서 나는 조언을 하지 않기로 했다. 이곳에서 만족하지 않았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은 내 마음속에만 지닌 채.




그러던 어느날 참한 신입 직원이 이직을 했다.

일도 잘하고 참한 신입 직원. 나와는 나이차이가 5년밖에 나지 않아 더 마음이 가는 친구였다.

일도 요령껏, 인간관계도 요령껏 잘하는 무난한 육각형 인재였다.

그런 그녀와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알게 되었다.

누추한 곳에 귀하신 분이 왔다는 것을.


우리 회사는 그녀가 원하는 업무만 평생 반복할 수 있는 회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절대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그런 업무들의 짬처리만 맡으며 방황할 게 뻔했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덮어뒀던 오지랖을 다시 부리게 되었다.


"야간에는 나랑 둘이서만 근무하니까. 나 말고는 지켜보는 사람도 없으니, 눈치 보지 말고 이직 공부해요."


신입 직원은 수줍어하면서 괜찮다고 대답했지만, 사실은 처음부터 이직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리고 몇 개월 만에 원하는 직무로 이직에 성공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나와 같이 근무하며 회사에 정이 들어 미련이 남은 듯한 그녀에게 나는 단호히 말했다.


"여기서 데여보기 전에 이직에 성공해서 조금 미련이 남은 듯한데, 데여봤다면 정말 한 톨의 미련도 없이 떠날 수 있었을 거예요. 미련 갖지 말고 가요."


그녀가 떠나고 나의 일은 더 많아졌다. 하지만 누군가의 인생을 구원하는데 조금은 기여한 듯한 희열감을 느껴 좋았다. 천불이 나는 소리나 하는 꼰대들의 말을 듣기 전에 도망친 후배님은 참 다행이었다.


"우리 회사 정도면 연봉 충분하지. 라때는 첫 월급이 50만원이었어."

내가 생각하는 '입사'라는 절차와는 다른 방식으로 들어와 회사를 다니신 으르신께 들었던 말이었다.




그러는 너는 왜 안 도망치냐고?

후배들 앞에서 '돔황챠'를 외치는 선배이면서 정작 나는 왜 여기에 남게 되었을까. 그렇다. 나는 사실 실패자다.


능력이 없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능력에 상관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이 회사에 몸담고 있는 것을 보면. 나보다 능력이나 스펙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좋은 회사로 떠나간 것을 보면.


바늘구멍 같은 기회들과 내 인생의 타이밍은 어긋났고 내가 원하는 운을 얻지 못하는 게 내 팔자였다.


누구보다 간절히 원했지만 운이 없어 이루지 못했던 것. 그것을 운 좋게 이룬 사람들을 질투하거나 원망하지도 않는다. 질투 어린 시선으로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회사는 다 똑같다', '거기도 좋은 회사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짜증이 난다. 여우와 신포도 같아서다. 회사 그까잇꺼 다 똑같다고 다 받아들이고 순응하는 둥글둥글한 분들 덕분에 우리 회사는 한결같이 이직사관학교라고 불리고 있는 것인지도.


바늘구멍 기회비용을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직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얻기 위한 비용은 크다. '합격'에 실패하면 모두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헛된 공부들에 소중한 시간을 써야하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헛된 공부로 오랜 시간을 소모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참 아쉬운 일이다. 그래서 이직을 준비하는 후배들에게 '당신의 노력은 짧고 굵었으면 한다'는 조언을 해주고 싶다.


이런 생각도 든다.

장수 끝에 실패한 내가 했던 그 헛된 노력으로 다른 것을 했다면? 역설적으로 이직에 성공했을지도?


바늘구멍에 합격하는 것만이 직장을 얻는 방법이 아님을 변화하는 세상이, 좋은 책이, 성공한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노력의 '방법'에 대한 고민도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대리님도 충분히 이직하실 수 있어요!"

얼마 전 회사 업무에 현타가 온다며 거침없이 말하던 MZ 신입사원이 나에게 다소 되바라지게 했던 말이다.

내가 신입들에게 '도망쳐'라고 말하던 상황이 역전된 것이다. 그 신입은 도망치고 싶은 본인의 마음을 나에게 전이시킨 듯했다. 내가 몇몇의 신입들에게 했던 것처럼.


정말 세상이 변하긴 했다. 십년차의 독기와 광기를 넘어서는 뉴비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런 세상에 이제 나는 어디로, 어떻게 달려야 할까? 고민이 많아진다.


아무튼 돔황챠! 낙원따윈 없을지라도!


누구보다 빠르게 난 남들과는 다르게 도망치는 허리케인(???)


이전 03화월요일에 기사 쓰는 독한 직장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