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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잠 Feb 06. 2021

직장에서 만난 권위주의

나는 말 안 듣는 신입사원이었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입사 전 나의 환상 속에서 역장님은 잘 다려진 정복을 입고, 멋진 정모를 쓰고 위엄 있고 인자한 자태를 지니고 있었다. 혹은 일본 영화 <철도원>에서처럼,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홀로 역을 지키며 자신의 소명을 다하는 숭고한 모습이었다. 저절로 고개 숙여지는 멋진 권위자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길 바랐다.


하지만 입사하자마자 만난 역장님의 별명은 박근혜였다. 그분은 어느 날 퇴근하려는 나를 역장실로 불러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경영정상화... 노조의 힘을 무력화... 지금이 기회... 노조 탈퇴’등의 단어가 들어간 이야기였던 것 같다. 무슨 말인지? 신입인 내게는 너무 어려운 이야기였다. 내가 노조원이었던 건 입사와 동시에 자동으로 노조에 가입되는 유니온샵 회사에 입사했기 때문이었다. 별생각 없이 노조원이 되었지만 그때 굳이 탈퇴를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잘 모르겠다. 생각해봐야겠다.’는 나를 한참 설득하던 역장님은 잘 생각해보라며 나를 퇴근하게 했다. ‘지금 내가 이야기한 건 절대 다른 곳에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당부를 끝으로.

    

나는 신입사원 모두가 가입되어있는 노조를 굳이 탈퇴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역장님의 설득 방식도 다분히 권위적이어서 설득적이지 않았다. 완곡한 거절의 표현으로 ‘생각해보겠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역장님은 내 생각에 도움이 되고 싶으셨는지 퇴근 시간마다 나를 역장실로 호출해 설득을 계속했다. 결국 나는 나의 의사를 정확히 전하게 되었고, 역장님은 거듭된 설득에도 거절 의사를 표현하는 나에게 분노를 느끼신 듯했다. 역장실 문을 나서는 내게 매서운 말투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래. 평생 노조원이나 하면서 살아.”


내 자리로 돌아온 나는 내가 작성한 ‘멘토 보고서’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회사에서는 신입사원의 회사 적응을 돕기 위해 회사의 간부들을 멘토로 정해 주었다. 역장님과 나는 회사에서 정한 멘토와 멘티 사이였다. 멘토는 멘티와 정기적으로 소통 활동을 한 뒤에 그 내용을 ‘멘토 활동 보고서’로 작성해 제출해야 했는데, 그것을 내가 작성했다.

‘신입사원과 함께 식사하며 개인 면담을 진행함. 회사 근처에서 거주지를 구해 독립생활을 시작한 신입사원의 근황을 이야기하고, 회사 생활의 애로 사항이 없는지를 상담하였음.’



어느 날 고객 전화가 울려서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사람은 나에게 역장과 통화하게 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바꾸어도 되는 사람인지 확인하기 위해 “실례지만 어디세요? 역장님께 어디시라고 전해드릴까요?”라고 물었다. 전화한 사람은 “바꾸라면 바꾸지 뭔 말이 많아요. 역장님 친척이라고.” 다짜고짜 화를 냈다. 친척이면 왜 핸드폰으로 전화하지 않았을까 의아해하며 역장님을 바꿔 드렸다.

역장님은 통화가 끝나고 내 자리로 와서 화를 내고 가셨다.

“바꾸라면 바꾸지 뭐 그렇게 말을 많이 했어. 다음부터 바꾸라면 그냥 바꿔.”

역장님의 친척이 전화를 받은 나에 대해 역장님께 말한 모양이었다. 사무실 분위기가 싸해졌다. 역장님이 자리를 비우고, 착한 팀장님 한 분은 역장님이 너무하셨다며 본인도 이해가 안 된다고 나를 진심으로 위로해주셨다.      



한 번은 역의 물품 구입을 담당하면서 이것저것 살림살이를 사달라는 요구들을 많이 듣게 되었다. 이것저것 사다 보니 찜솥을 사달라는 직원들의 요청은 거절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역장님이 내 자리로 오더니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에이. 직원들이 일하면서 출출할 때 음식도 쪄서 먹을 수 있고 좋지 뭐. 찜솥 하나 구매해.”

하지만 오래 가열해야 해서 자칫 화재의 원인이 될 수도 있는 물품을 구입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돌려서 말했다.

“역장님. 공금으로 찜솥을 구입하는 건 좀 그렇습니다. 그래도 정말 필요한 물건이라고 하시면 저희 어머니께서 저 쓰라고 보내주신 큰 찜솥이 저희 집에 있는데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어요. 그걸 역에 기증해드리겠습니다.”

“뭘 그렇게까지 해. 그냥 찜솥 하나 사면 되잖아.”

그럼 역장님이 하나 하사해주시는 건 어떨까 싶었지만 나는 아무 대답 않았고, 찜솥을 구입하지도 않았다. 나도 이제는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역장님의 정년퇴임식이 다가왔다. 퇴임식 행사를 담당하는 부서에서 우리 역장님을 위한 영상을 찍어달라는 요청이 왔다. 직원들이 역장님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영상을 촬영하면 되었는데, 이를 전해 들은 직원들은 ‘나는 할 말이 없다.’며 영상 촬영을 피하는 분위기였다. 막내인 내가 총대를 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막강한 연기력으로 감사 인사 영상을 찍었다.

“역장님. 제가 이 역에 초임으로 와서 적응해야 하는 부분이 많았는데 이를 항상 살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처음 이 회사에 입사해 만난 역장님이 역장님같이 너무 훌륭한 분이셔서 저는 참 행운아인 것 같습니다.
역장님 사랑합니다! (하고 손으로 하트를 그린다!)”

멘토 보고서만큼 잘 꾸며낸 그 영상이 행사 부서에서는 괜찮게 보였는가 보다. 퇴임식 행사 영상에서 내가 찍은 부분이 피날레를 장식했기 때문이다. 나는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역장님도 그걸 보고 얼마나 머쓱하셨을까.     

 


역장님께 나는 건방진 신입사원이었다. 역장님의 권위에 순종하지 않고, 살갑게 기분을 맞춰드릴 줄도 몰랐다. 영상에서처럼, 평소에도 아부를 했더라면 나는 이쁨 받는 사원이었을까? 역장님의 요구를 다 들어드렸다면 좋았을까?      


역장님은 그렇게 사셨을 것이다. 권위에 순종하고, 높은 분들께 좋은 말들을 하며 회사에서 생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않는 내가 괘씸하고 싫었을 것이다. 조금은 이해가 된다. 나도 내가 백 퍼센트 잘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는 역장님의 이미지를 ‘위엄 있고 인자한 분’이라고만 상상했던 세상 물정 모르는 사회초년생이었다. 그러니 어린 내가 조직에 융화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 경력과 권위로 나를 진심으로 납득시킬 수 있었다.      


어느 퇴근길, 권위주의의 끝판왕어떤 부역장과 눈이 마주쳤다. 그 눈이 마주치는 순간마 큰 거부감을 느끼게 하는 볼드모트 같은 사람이다. 하지만 업무가 끝난 퇴근길 그는 사실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었고 곧 각자의 갈 길로 퇴근할 따름이었다.

회사라는 연결고리 없이 회사 밖에서 스치면 그저 그런 아저씨인 사람이다. 그저 그런 아저씨와 아주머니일 뿐인 그들의 권위주의에 너무 스트레스받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그래서 이제는, 가슴을 졸이며 처신을 고민하던 신입 시절 내 모습을 웃으며 추억할 수 있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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